미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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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일보
  • 승인 2013.01.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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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형란 (경상사대부설고 교사)
봄이 어디쯤 와 있는지 바람의 냄새를 맡아보면 안다. 이리저리 구부러진 국도변에 잠시 차를 세운다. 다른 지역보다 서둘러 온 바람이 쓸쓸한 향기를 털어내고 열어 둔 창 안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몸을 길게 늘어뜨려 허공에서 부서지는 나의 머리카락을 낮은 데시벨로 부드럽게 빗질하기 시작한다. 내가 사는 곳에는 겨울에 내린 눈이 아직 녹지 않았고 응달진 곳에서 꽁꽁 언 얼음은 여전히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런데 이곳 남해에서 삼월의 봄을 미리 본다.

애플의 창업자인 고(故) 스티브 잡스가 2005년도에 스탠포드대학에서 했던 축사는 지금까지도 주목을 받고 있다. 특히 ‘Stay hungry, Stay foolish’는 스티브 잡스처럼 꿈을 갈망하는 사람들의 바이블 코드로 자리매김했다. 그리고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 여러분은 미래를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만을 연관시켜 볼 수 있을 뿐이죠.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현재의 순간들이 미래에 어떤 식으로든지 연결된다는 걸 알아야만 합니다.” 즉 현재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미래 ‘미리 보기’ 화면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원고 인쇄를 하기 전에 누구나 미리 보기 화면을 띄운다. 붉은 선으로 주의 신호를 보내는 여백을 먼저 클릭하고 쪽의 수가 원하는 대로 되었는지도 살펴보며 프린터는 제대로 설정되어 있는지도 검토한다. 아무튼 작업 중인 화면에서 확인하기 어려운 작업들을 최종적으로 따지고 헤아려보는 것이다. 몇 분 뒤 인쇄기에서 뽑혀져 나올 산물들이 부작용 없이 제대로 이뤄지도록 간절히 바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원고도 미리 보기 화면에서 잠시 머무를 예정이다.

현재 내 삶의 파노라마를 누군가가 미리 보기 화면으로 본다면 어떤 문제점을 검사해서 조절하고 있을 것인가, 바쁘다는 핑계로 아이가 성의껏 물어오는 질문에 무성의하게 대응해서 실망을 안겨 준다든가, 하기 어려운 말을 겨우 끄집어낸 학생의 마음을 보기 좋게 외면해 무안을 준다든가, 한 번만 다녀가라는 부모님께 다음 기회에 라는 변명으로 늘 미루고만 있는 나의 모습을 미리 본다면 어떠할까, 아마도 이어서 출력 아이콘을 누르기는 힘들 것이다.

남해의 봄이 옹알이를 하는 아이처럼 미리 와 있다. 살랑살랑 기분 좋은 바람을 접어서 반은 종이배에 띄워 내가 사는 남강으로 보내고, 또 다른 반은 나의 주머니에 넣어 가고 싶다. 그래서 미리 보기에서 아이와 학생과 우리 부모님께 내가 불어넣었던 서운하고 매정한 바람을 회수하고, 대신 다정다감한 이 바람을 나에게서 멀어져 가는 그들의 가슴에 “후우” 하고 불어넣고 싶다. 그리고 미리 와 있는 상냥한 바람이 놀고 있는 강변을 그들의 작고 어린 손 혹은 무심한 세월의 손을 잡고 걸었으면 좋겠다.

/경상사대부설고 교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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