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소장 사이에서 뽑아낸 현실의 칼날
공소장 사이에서 뽑아낸 현실의 칼날
  • 연합뉴스
  • 승인 2013.0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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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찬 단편소설집 '정결한 집'
평범한 고교생이 1등을 바라며 체벌하는 어머니에게 한동안 조작한 성적표를 내민다. 학부모 방문의 날을 앞두고 진짜 성적이 들통날까 걱정된 학생은 어머니를 흉기로 찔러 살해하고 시신을 둔 방의 문을 둘러 공업용 본드를 바른다.

학생은 반년 넘게 어머니의 시신과 함께 산다. 그러다 별거하던 아버지의 방문으로 존속살해와 사체유기의 범행은 막을 내린다.

2011년 11월 시민의 입길에 오르내렸던 이 사건을 소설가 정찬은 단편 ‘정결한 집’으로 끌고 온다. 칼꽂이에 꽂힌 네 개의 칼을 내려다보는 소년에게서 시작된 이야기는 어머니를 살해한 뒤 범행이 적발되기 전의 시기에서 끝난다.

부응할 수 없는 자식에게 기대하고 모질게 손을 대는 어머니, 성적표를 조작하는 것으로 더 큰 체벌을 면하는 자식, 끝까지 자식에게 왜곡된 기대를 밀어붙이는 어머니, 잠든 어머니 앞에 흉기를 들고 선 자식의 얼굴을 갈팡질팡 따라갈 때 마주하는 것은 아무리 부모라도 타인이라면 끝내 이해할 수 없을 쓸쓸함이다.

소설 밖 실제 사건에서 학생은 재판을 받고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에서 서울고법 조경란 부장판사는 판결문을 읽어내려가며 “피고인과 같은 사춘기 자녀를 둔 어미로서 피고인 부자의 죄책감과 고통을 가슴 깊이 공감하고 이해한다”며 울었다.

학생이 부딪힌 시간에 대해서는 학생 말고는 알 도리가 없다. 학생 자신도 어쩌면 매일매일의 감정과 혼란, 그리고 행위의 시비(是非)를 분별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학생을 전부 이해할 필요도, 그럴 수도 없지만 ‘어미를 죽여 천벌을 받을 놈’이라고 욕할 수만은 없는 시간의 갈피갈피를 작가가 소설로 열어 보인다.

‘정결한 집’ 말고도 해고 노동자의 굴뚝농성과 자살을 다룬 ‘흔들의자’와 용산참사 한복판에 직접 뛰어드는 ‘세이렌의 노래’ 등 총 8편의 단편이 수록됐다. 대체로 몇년 사이에 기사로 접한 사건들의 얼개에 공소장과 판결문 바깥으로 밀려났을 이야기들로 인생의 복잡한 얼굴을 추적한다.

문학과지성사. 275쪽. 1만2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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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한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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