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 지폐, 신뢰
금, 지폐, 신뢰
  • 경남일보
  • 승인 2013.03.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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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일현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학장)
미국의 실물 은화가 과거의 판매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2013년 1월 한 달 실버이글(미국의 1온스 은화) 판매량이 2007년 1년치 판매량보다 더 많다. 1년 전부터 독일은 미국과 프랑스에 맡겨 두었던 금을 자국으로 회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중국은 국가적으로 금을 비축하는 중이다. 조지 소로스 같은 억만장자들도 엄청난 양의 금을 사들인다. 도대체 어찌 된 일일까. 게다가 2012년 신용평가사 피치(Fitch)는 시티은행, 골드만삭스, 도이치뱅크 같은 어마어마한 은행의 신용을 떨어뜨렸다. 금융에 문제가 있다기보다는 화폐 자체에 문제가 생겼다는 뜻이다.

역사로 잠시 돌아가 보자. 1860년대까지 미국에는 국가지폐가 없었다. 미국 내 8000개 사설 은행들이 금을 각자 보유하면서 나름 1만 가지의 지폐를 발행했었다. 미국 각 지역민들은 사설은행이 소유한 금을 믿고 지폐를 사용했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 그리 정직할 수만은 없다. 은행은 소유한 금보다 더 많은 양의 지폐를 찍었고 미국 각 지역은 인플레이션으로 시달렸다.

한편 금이 없던 중산층과 서민은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금으로 갚아야 했으니 가진 집과 땅을 은행에 빼앗기기 일쑤였다. 금을 많이 가진 사람이 은행을 만들면 금본위제가 오히려 독으로 변하는 것이다. 미국 연방정부는 중앙은행을 통해 은행권을 통일시키고자 했지만 금을 가진 사설은행을 쉽게 이길 수 없었다. 정부 또한 전쟁과 국가비용 처리를 위해 사설은행에게 돈을 빌렸으니 말이다. 금이 없던 미국정부가 내세울 것은 신뢰밖에 없었다. 링컨 대통령은 “국가를 믿고 지폐를 쓰세요”라며 국민을 설득했다. 이리하여 중앙정부 지폐인 그린백(Greenback)이 탄생했다. 위조를 어렵게 하기 위해 지폐의 뒷면을 온통 초록색으로 처리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로써 미국정부는 전쟁으로 인한 빚을 갚을 수 있게 되었다.

은행이 금을 가지고 대출을 해서 신용을 창출하는 반면, 정부는 조세를 근간으로 지폐를 발행한다. 금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신용을 창조하는 은행은 사기꾼이며 조세법이 없는 국가는 없다. 은행은 사기꾼이 되지 않기 위해 정부의 신뢰를 등에 업고 대출하고, 정부는 조세를 통해 은행에 돈을 꿔 준다. 은행과 정부가 합작하여 만든 은행을 중앙은행, 그들이 만든 지폐를 금본위제 법정통화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금만큼 중요한 것은 링컨정부 같은 신뢰 있는 정부다. 정부의 신뢰는 국민의 대표성에서 오며 그 대표성은 민주주의에 의해 구현된다. 민주적인 정부가 경제에 신뢰를 주며 그 신뢰를 근간으로 금이 가치를 지니며 양자의 존재 하에 강한 지폐, 신뢰 있는 지폐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스위스 프랑의 오래된 신뢰는 스위스의 민주주의와 금 보유량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금과 상관없이 세계에 유통시킨 지폐가 달러다. 달러는 금 없이도 미국이라는 나라만 믿고 유통되는 ‘믿음’인 것이다. 그 믿음에 커다란 균열이 생긴 때가 2008년이었다. 물론 이전에도 불신은 있었다. 미국연준 전 위원장인 버냉키가 이 대학 저 대학 다니면서 지폐달러의 효용성을 강의하고 있다. 금본위제를 비판하며 돌아다닌다. 그린스펀 또한 중국이 보유한 금이 미국의 1/8밖에 안돼서 기축통화가 될 수 없다고 난리를 친다. 그러나 중국정부 말고도 중국인 개인이 소유한 금을 모두 합치면 미국이 소유한 금 보유량을 훌쩍 뛰어넘는다. 달러를 포함한 지폐에 대한 신뢰 자체에 문제가 생긴 현재, 경제학자들이 눈길도 주지 않던 금본위제가 수면 위로 떠오르니 미국연준 사람들이 저렇게들 겁을 내는 것이다.

앞으로의 세계가 어떤 방식으로 구성될지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지만 원칙만 알면 앞으로의 세계가 어떻게 ‘구성되어야 할지’ 정도는 알 수 있다. 국가가 국민에게 신뢰를 주지 못하면 금화를 통용시키면 된다. 금이 부족하더라도 국민이 국가를 신뢰하면 지폐가 통용되게 되어 있다. 이 경우 신뢰의 내용은 민주주의, 복지, 군사력, 국민의 자긍심이다. 이는 국가 내부에도 적용되는 것이고 해외교역에도 적용되는 내용이다. 신뢰를 잃은 미국이 갈 길은 뻔하다. 신뢰를 다시 얻어 오는 것이다. 물론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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