웃지만 우울한 감정노동자
웃지만 우울한 감정노동자
  • 경남일보
  • 승인 2013.05.24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혜숙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
‘콜센터 상담원들은 자동응답기가 아닙니다’, ‘욕설, 성희롱에도 ‘사랑합니다 고객님’’, ‘웃음 때문에 침몰하는 감정노동자’, ‘아무도 모르게 흘리는 눈물’, ‘웃다가 병든 사람들’ 등등. 최근 문제가 된 감정노동자의 모습을 단적으로 드러내주는 신문기사의 제목들이다. 그러면서 항공기 승무원이 승객의 욕설과 폭행에 무방비로 당한 일이며, 2분40초 동안 횡설수설하는 사람에게 꼬박꼬박 응대한 상담원 녹취 파일이 보도돼 화제가 됐다.

감정노동은 다른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얼굴 표정이나 몸짓을 만들어내기 위해 감정을 관리하고, 다른 사람의 감정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통제하는 일을 수반하는 노동을 뜻한다. 산업이 고도화되고 서비스업 종사자가 늘면서 나타난 노동형태인데, 미국 버클리대 교수 앨리 러셀 혹실드는 그동안 사적 차원에서 개인의 자질 혹은 인간적인 특성으로만 여겨지던 ‘감정’이 어떻게 시장 속에서 상품화할 수 있는 자원으로 바뀌었는지를 살펴보면서 감정노동을 처음 정의했다. 현대는 사람의 감정까지도 상품화했고 서비스 업종은 특히 이러한 감정노동을 필수로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한국의 서비스산업 종사자는 1200만명인데 이 중 600만명은 ‘을’로 사는 감정노동자로 추산된다. 고객만족이 기업의 성패를 결정하는 서비스 사회에서 감정노동은 항공회사, 백화점과 같은 전형적인 서비스 기업뿐 아니라 공무원, 의사, 상담원 등의 전문직에까지 급속하게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감정노동은 여성에게 더 많이 부가되는 양상을 보인다. 은행의 창구직원, 백화점 판매원이나 음식점의 종업원 등 서비스 업종 종사자의 여성 비중이 높고, 대면 서비스 업무는 대개 여성에게 맡기는 경우가 많은 까닭이다. 또 ‘친절, 미소, 돌봄’ 등이 여성에게 적합하며 ‘남의 기분을 맞춰주는 일이라 여성이 더 잘한다’는 편견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감정노동은 전통적으로 가정 내 여성들의 성 역할 수행에서 무보수로 행해졌던 돌봄이나 감정관리 활동이었지만 오늘날에는 여성의 옷차림과 외모, 말씨, 표정, 행동까지도 고객만족을 위한 감정노동의 핵심 직무요건이 되고 있다. 감정노동을 하는 사람은 고객의 기분을 좋게 하려고 긴장하며 자기감정을 관리해야 한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의 ‘직업별 감정노동 실태조사’에 따르면 최근 한 대기업 임원의 ‘라면 폭행’ 사건으로 주목받은 항공사 승무원이 감정노동이 가장 심한 직업으로 꼽혔다. 그 외 홍보 도우미와 판촉원, 통신서비스·이동통신기 판매원, 장례상담원·장례지도사 등이 뒤를 이었다.

이러한 장기간 감정노동을 하는 근로자들은 심한 스트레스로 정신적·육체적 병을 앓는 경우가 적지 않다.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smile mask syndrome)’이 대표적이다. 이 병은 ‘밝은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겉으론 웃지만 속으론 늘 우울해하고 식욕, 성욕 등이 떨어지는 증상을 가리킨다. 이처럼 감정노동자들은 감정조절 과정에서 발행하는 스트레스로 인해 공황장애, 감정 불감증, 불면증, 우울증 등의 각종 심인성 질환에 시달리고 있다. 위장 장애는 기본이고 유산이나 불임 고통을 호소하는 여성도 많다. 성희롱, 욕설과 같은 폭력 역시 여성노동자들이 남성노동자들에 비해 많이 노출되어 있다.

감정노동자가 불편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개인적인 대처법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 문제는 개인이 아닌 사회적 관점에서 해결방안을 모색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국가인권위원회가 근무환경개선을 위한 ‘여성 감정노동자 인권 가이드라인’을 만들고 내년 안으로 마트 판매원, 콜센터 상담원 등 감정노동자들의 인격권과 노동권 법제화에 나선 것은 고무적이다. 산업안전보건법이나 특별법에 감정노동자 보호조항을 명문화해 인권개선에 나설 방침이라고 한다. 이와 함께 지역을 순회하며 소비자단체와 함께 여성 감정노동자 인식 개선 캠페인도 펼치고 있다.

대표적인 감정노동자인 콜센터 노동자들의 노동인권 보장을 위한 공동 캠페인단도 출범했다. 이들은 ‘전화기를 내려 놓고 숨·쉴·틈을!’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본격적인 운동에 돌입했다. 감정노동과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을 산업재해로 인정하는 법제화의 필요성과 함께 소비자들의 인식변화도 시급한 과제이다.

이혜숙 (경상대 사회학과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