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적인 인연에 대하여…
운명적인 인연에 대하여…
  • 경남일보
  • 승인 2013.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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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예준 (지리산고교 교사)
‘위대한 개츠비’라는 영화를 보았다. 가난한 개츠비는 데이지라는 상류층의 여성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하지만 곧 개츠비는 1차대전에 참전하게 되고, 데이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데이지와 재회하기까지 5년이 흐르는데, 다른 사람들에게 5년이라는 시간은 일상적으로 흘러갔지만 개츠비에게만은 이 5년이라는 시간이 오직 데이지만을 위한 시간으로 흘러간다. 오직 데이지를 위해 돈을 벌고, 번 돈으로 데이지의 집이 보이는 곳에 대저택을 사서 혹시 데이지가 오지는 않을까, 매일 밤 파티를 연다.

개츠비가 5년 만에 데이지와 재회하는 장면은 자못 인상적이다. 꽃들이 만개한 정원에서 재회를 계획했던 개츠비가 갑자기 내리는 비 때문에 실내에서 데이지를 만날 수밖에 없게 되자 정원의 꽃들을 꺾어서 방안을 정원으로 만들고 데이지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던 것은 개츠비와 같은 ‘누구에게나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바꿔 놓을 운명적 인연’이라는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내게는 그런 인연이 있다. 서울에서만 살아 왔던 나는 어찌보면 모태 서울사람이다. 그런 내가 지리산고등학교에 오게 된 것은 ‘가난한 학생들을 위한 교직생활을 하고 싶다’는 소박한 꿈 때문이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그 일이 얼마나 많은 가난이 만든 그림자들에 직면하게 되는 것인지 생각하지 못했던 나에게 그 ‘소박한 꿈’이란 어쩌면 ‘낭만적 허영’이었을지도 모른다.

눈이 부시도록 햇살이 아름다웠던 날, 나는 눈이 부시도록 눈빛이 순수한 우리반 학생들을 만났다.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이라고 들었던 터라 어두운 학생들을 상상했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구김살 하나 없이 밝았다. 수업시간에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든지 ‘꺄르르’ 웃었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학교에서 TV, 휴대폰 등이 단절된 채로 살다보니 내가 해주는 이야기들이 다 그 자체로 재밌고 새로웠던 것이다. 그래서 한동안 주말마다 인기 있는 드라마를 하루종일 보고 와서 한편씩 구연 드라마(?)를 해주었다. 그렇게 1년이라는 시간이 훌쩍 흐르고 나는 고스란히 우리반 아이들과 같이 진급해 고3 담임이 되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들과 함께한 2년이란 시간은 나에게 있어서 다른 사람들과 같이 일상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2년이란 시간 동안 이 학생들과 함께한 기억들이 나의 세포 하나하나가 되었고,내게 2년은 오직 이 학생들만을 위한 시간으로 흘러갔던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에 개츠비가 바다 건너편 데이지의 집에서 명멸하는 초록색 불빛을 손으로 잡으려 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것은 데이지로 상징되는 자신의 꿈이자 데이지만을 위해 살아온 5년 간의 시간이었을 터이다. 지금쯤 서울 어느 학교에선가 교편을 잡고 있을 나를 이곳 지리산 자락의 작은 학교로 불러온 초록색 불빛이 지금 우리반 학생들의 눈빛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리고 그 눈빛을 쫓아 살아왔고, 앞으로 살아갈 내 인생의 시간은 여느 시간들처럼 일상적으로 흘러가지는 않을 것이다.

이예준 (지리산고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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