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희네 집에서 박경리를 생각하다
서희네 집에서 박경리를 생각하다
  • 경남일보
  • 승인 2013.06.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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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철 (관봉초등학교 교장)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배경이 되는 섬진강변 악양들 평사리를 굽어보는 서희네 집 앞에 섰다. 멀리 들판 한가운데에 다소곳하게 선 두 그루의 소나무가 아득하다. 사람들은 이 두 소나무를 ‘부부송’이라고 부른다. 만일 이 너른 들판 한가운데 홀로 키 큰 소나무 한 그루가 섰더라면 얼마나 외로워 보였을까. 다행히 두 그루가 마주보고 있어 평사리 너른 들판이 외로워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소설 ‘토지’는 통영출신이며 진주에서 여고를 나온 박경리의 대하 역작이다. 소설이라기보다 격동의 시기를 살아온 우리 민초들의 애잔한 생활사를 섬세한 필치로 그려낸 두꺼운 일기장과 다르지 않다. 우리 문학사에 이만한 작품을 가질 수 있다는 것 또한 한국인으로서 자부심이 아니겠는가. 그녀는 1926년 10월 28일에 통영에서 태어나 우리의 식민지사 한가운데서 자랐고 광복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사는 일은 결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배웠을 사람이다. 소설 ‘토지’를 마무리한 10여년 후 그녀는 향년 81세인 2008년 5월 5일 영면했다.

소설 ‘토지’는 우리 근대사에 있어 격랑의 시기인 1897년부터 1945년 광복에 이르는 기간을 배경으로 새로운 운명에 맞서는 인간들의 거대한 이야기가 두루마리처럼 펼쳐진 우리네 민초사이기도 하다. 그녀는 한때 원주에 머물며 칩거하게 된 까닭을 소설 ‘토지’를 위해 자투리 시간이 아니라 두루마리 같은 시간을 쓰고 싶었던 때문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두루마리 같은 시간이라는 말은 소설 ‘토지’의 문학적 배경과 무게중심을 분석해 볼 수 있는 하나의 단초가 된다. 낱장의 넘김이 아니라 단 한 장의 종이로 길게 이어 둘둘 말려진 두루마리는 시간과 공간의 연속성을 표현하는데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한다. 그녀는 이 단절 없이 길게 이어진 우리 역사의 한 공간, 즉 구한말에서 을사늑약으로 병합된 소위 ‘한일합방’을 거쳐 1945년 광복에 이르는 고난의 시대를 살며 수세대에 걸쳐 역사의 전면에 드러나지 않았을 민초들이 겪었던 아픈 생활사를 단절 없이 내밀하게 그려내고 싶었던 것일 게다.

그녀는 1969년부터 1994년까지 무려 25년이란 긴 시간을 소설 ‘토지’에 매달리는 초인적인 의지를 발휘했다. 원고지 3만여장을 육필로 써 넘기는 그야말로 지난한 과정을 거치며 65세의 나이쯤에서야 비로소 소설의 끝을 마무리했으니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다가도 그녀가 끌고 가는 수많은 인물들과 방대한 사건들의 극적 구성과 치밀한 스토리 전개에 문득 놀라게 된다. 다만 이곳 최참판 집에 들어서 생각해보니 박경리 그녀의 정신세계가 너무 넓고 아득해서 감히 헤아리기가 송구스럽다. 또한 그녀와 우리가 동시대를 살다 간 분이라는 게 더 없이 자랑스럽기도 하다.

담장 너머 후원을 넘겨다보니 서희 그녀가 머물렀을 별당 마루 앞 섬돌엔 예쁜 꽃신 하나가 쓸쓸하게 빈집을 지키고 있었다.
김병철 (관봉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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