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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를 피해 그림 같은 숲길로 녹아드는 길(44) 3번국도 경남의 끝자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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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8.1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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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거기리 성황단
 
 
 
삼복더위가 유난깨나 떠는 별난 여름이다. 올해는 예년과는 달리 장마의 시작부터가 남부가 아닌 중부지방부터여서 조짐부터가 심상치 않더니만 기어이 폭우를 끌어다 퍼부으며 마치 융단폭격이라도 하듯이 숨을 돌릴 짬도 없이 물 폭탄을 쏟아 부었고, 49일간이라는 유난히도 긴 장마라고 하지만 남부지방은 38도 안팎의 용광로 속 같은 폭염의 연속이었지 장마는커녕 소나기 몇 줄기가 고작이었으니 좁은 땅덩이가 이럴 때는 구만리나 되는듯하다. 계속되는 폭염과 열대야는 바다나 계곡이나 피서인파로 미어터져 난민수용소를 방불케 하고 있어 어디 한 곳 편안하게 자리를 잡을 만한 곳이 없어 야단들이라는데 내 하나를 보탤게 아니라 이참에 3번국도 경남의 끝자락을 찾아 길을 나섰다.

거창읍에서 경북 김천으로 이어지는 3번국도 2차선 옛길을 따라 외진 길로 접어들면 유명세만큼이나 이름값을 하는 거창의 명물인 사과와 포도밭이 산비탈이나 들녘이나 할 것 없이 사방천지로 널려 있고 정작으로 벼논은 틈틈이 자리를 잡았을 뿐이다.

거창읍을 막 벗어나자 수목이 짙푸른 앞뒷산은 봉긋봉긋한 봉우리마다 등과 골로 주름져서 진녹색의 물결이 일렁이는데, 산자락이 옴쏙한 곳이면 옹기종기한 촌락이 푸른 숲과 어우러져서 아등바등 삶에 쫓기는 현대인의 고달픔은 흔적조차 보이지 않고 고요와 평화로움만 가득하고, 사동마을 뒷산 대숲에는 점점이 하얗게 백로가 떼를 지어 앉았는데 푸른 하늘에 흰 구름 몇 점 띄웠으니 접었다가 펼치면 영락없는 병풍이요 테두리를 둘러치면 색조 짙은 풍경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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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 동호리 숲길

봉황대 앞 삼거리에 닿자 황토색 안내판이 뙤약볕 아래서 벌겋게 달아서 기력을 잃은 듯 ‘거기리 성황단’이 2km 안에 있다고 간신히 일러준다. 불현듯 정비석의 단편소설 성황당이 생각나서 길머리를 잡았다. 숯을 굽던 남편 현보는 산림법위반으로 끌려가고 순이가 홀로남아 한없이 빌고 빌었던 성황당은 아니지만 우리들의 오랜 옛날 할머니로부터 대물림하며 빌고 빌었으며 할머니의 할머니들이 전지전능함을 철석같이 믿어 왔던 버팀목이 아니던가. 작은 산모롱이를 돌자 꽤나 널따란 도랑인 계수천을 앞에 두고 육모정자가 시원스럽게 우뚝한데 가족들인 성싶은 예닐곱씩의 사람들이 모닥모닥 자리를 잡았고 계수천을 가로막은 작은 보는 청정호수가 되어 아이들이 뒤엉켜서 물장난으로 신바람이 났다.

사과나무와 호두나무숲에 가려진 마을 초입에 들어서자 용틀임한 노송 두 그루가 우뚝하게 나란히 선 아래로 커다란 돌무더기의 돌탑이 얼핏 보아도 성황단임을 알 수 있어 길섶의 표지판은 할 일이 없어 풀이 죽어 시들하다.

커다란 호두나무가 울타리로 줄지어선 사과밭 들머리에 돌이끼가 유난히도 파랗게 뒤덮인 돌무더기의 둥그스름한 돌탑이 구불구불한 황금송 두 그루를 신목으로 앞세우고 마치 천상에서 내려놓은 청동대종같이 웅장한 모습으로 자리를 잡았다. 밑돌에서부터 돌의 크기와 원둘레를 줄여가며 촘촘히 쌓아 올린 맨 상단에는 두개의 돌을 쫑긋하게 세워 종두처럼 보인다. 높이가 4.6m에 밑둘레가 24.3m 라니 크기도 웅장하다만 500여년의 세월을 지켜 왔다니 만고풍상도 오직했으랴만 수많은 사연 얽힌 온갖 발원을 낱낱이 들어주며 오늘에 이르렀으니 온고지정이 따사롭기 그지없다.
우리들의 옛사람들은 동구 밖 정자나무 아래에 돌탑을 쌓아서 성황당을 짓거나 뻐드렁이에 퉁방울 같은 눈을 부라린 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인 돌장승 또는 목장승을 세워서 길목을 지키게 하고 정월대보름에 금줄을 치고 한 해 동안 온갖 잡귀의 출입을 금하고 길흉화복을 갈라서 궂은 일 없도록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신성시되며 동제를 지내던 엄중한 성역이었다. 거기리 성황단은 처음부터 당집은 없었기에 성황당이 아니고 돌탑의 제단이라서 성황단이라 했는데 마을 젊은이들이 동제를 위한 금기사항이 까다롭고 절차가 복잡하고 번거로워서 한때는 동제를 지내지 않았는데 엽연초의 건조실인 담배굴에 불이 자주 일어나고 마을의 소들이 죽어나가는 등 재앙이 이어져서 다시 동제를 직접 모신다는 윤병순씨는 근거 없는 이야기지만 주민간의 화합과 결속에 더없는 보탬이 되고 예와 도를 갖출 줄 아는 올곧은 삶의 교육적인 보람이 크단다. 그래서 성황단과 접한 사과농장에 오면 언제나 든든함을 느낀다며 보해산 깃대봉의 용마가 이곳으로 건너뛰면서 계곡에 찍힌 말발굽자국이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있는데 옛 이야기들이 하나 둘 잊혀져간다면서 아쉬워했다. 이어져 오는 구전을 따라 정성스레 돌 세 개를 성황단에 올려놓고 두 손을 모았으나 옛 정취에 흠뻑 젖어 정작으로 소원은 빌지 못하고 ‘부디 영험함을 길이 이어주옵소서!’ 하고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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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동호 이씨고택

내친김에 경남의 끝자락까지 가볼 요량으로 왔던 길을 돌아 나와 다시 3번국도를 따라 웅양면 쪽으로 차를 몰았다. 주상면 면소재지를 지나 2~3km를 가다보면 계수천과 만난다. 간간이 오가는 차들은 바쁘게만 지나가고 송천휴게소 주변은 정작 인적이 드물어 찾는 이는 없어도 반석 좋고 물이 맑아 청량감을 더하는데, 골골이 비탈진 밭은 온통 포도밭으로 조성돼 있어 해발 고도가 높아선지 웅양포도의 유명세는 전국으로 날린다.

웅양초등학교 앞을 지나자 ‘이씨고택’을 알리는 표지판이 우회전을 하라며 옷소매를 잡는데 또 하나의 안내판이 눈길을 끈다. ‘솔향기 돌담마을’ 이란다. 얼핏 보아서는 마을이 있을 것 같지를 않건만 들판건너 우거진 숲 사이로 가르마 같은 빤한 길이 뚫려있어 차를 몰았다. 낙락장송이 울울창창한 끝없는 솔숲사이로 멋있게 굽어진 포장도로가 끝이 보이지 않아 별천지로 이어지는 듯 황홀경이다. 걷고 싶은 길이 이보다 더할 곳이 또 있을까 싶다. 솔숲 깊숙한 그늘에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차문을 열자 송진 내음을 물씬 풍기는 시원한 바람이 밀려와 숨이 갑실지경이다. 더구나 소나기가 한줄기 지난 뒤끝이라 솔내음과 흙내음이 섞여서인지 청량감이 전신을 휘감는다. 길의 곡선이 멋의 극치를 이루는데 끝자락은 짙푸른 활엽수가 하늘을 덮었다. 발그레한 홍송의 군무인가! 홍학의 군무인가! 아름드리장송들은 하나같이 고부장고부장 여유롭게 굽어서 하늘을 향해 굼실거리며 연방도 키를 쑥 쑥 늘리며 커 오르는 것 같은데 선채로 휙 한 바퀴를 돌아보니 미끈미끈한 다리를 들낸 소나무들이 군무를 하듯이 떼를 지어 걷는 것 같다.
 
300그루의 아름드리 홍송과 키와 나이를 같이한 200그루의 도토리나무가 7000평에 우거졌으니 솔향기 그윽한 푸른 숲의 천국이다. 혼자 걷기가 참으로 미안한 길을 따라 한참을 걸으면 참나무 숲의 끝머리에는 수령 510년에 밑둘레가 4~5m가 넘는 느티나무 세 그루가 하늘을 덮었고, 마을집이 보인다 싶은 들머리에는 이끼 낀 돌무더기의 돌탑을 마주하고 ‘서당단’이라고 음각된 커다란 바윗돌이 버티고 섰다. 회화나무 그늘 아래로 나직한 대문을 들어서자 옛 서당이 세월의 흔적만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명심보감을 소리 내어 읽던 학동들이 그리워 창호지를 다시 바르고 하염없이 기다린다. 아이들이 매달려 놀던 마루청기둥은 왼쪽은 원기둥이고 다음은 사각이고 그다음은 8각기둥인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 수 없으나 기둥 모두가 싸리나무라니 놀라울 뿐이다.
 
동호마을은 90호가 산다는데 모두가 돌담장을 돌아앉아 사과나무에 가려졌고 호두나무 숲에 감춰져서 여남은 집만 보일뿐인데 개울을 거슬러 올라가니 솟을대문이 나란히 섰다. 경남도 문화재자료 371호인 ‘영은 고택’과 122호인 연안이씨의 종가인 ‘동호리 이씨 고가’가 돌담장 하나를 사이에 두고 나란하게 앉았다. 삼대부자가 없다던데 얼마나 많은 공과 덕을 쌓았으면 6대에 이르기까지 삼천석지기로 이어져 왔을까? ‘이리 오너라!’ 하고 헛기침을 크게 하면 연방이라도 마당쇠가 쪼르르 나올 것만 같은데, 500년 기나긴 선조의 얼이 서린 만고상청 푸른 솔에 떼를 지은 왕매미가 불영산 골짜기를 찢어져라 울어댄다.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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