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반 놀리는 춤사위에 한바탕 속 풀이
양반 놀리는 춤사위에 한바탕 속 풀이
  • 김철수
  • 승인 2013.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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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전통예술축제 참가작품] <5>고성 오광대
경남일보가 주최하는 제1회 경남전통예술축제에 참가하는 고성오광대는 국가중요무형문화재 7호로 지정돼 있다.

‘오광대’란 다섯 광대 또는 다섯 마당으로 이루어진 놀이라는 뜻에서 비롯된 것이라고도 하고 오행설(五行說)에서 유래된 오(五)에서 온 것이라고도 하는데, 오행설 의견이 유력하다. 작품내용과 각과장별 내용 유래 특색등에 대해 알아본다./편집자주

제1과장 고성오광대 문둥북춤
제1과장 고성오광대 문둥북춤


고성오광대는 민중의 삶의 모습을 반영하고 있으며 양반과 파계승에 대한 풍자, 그리고 처와 첩의 문제 등을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말뚝이의 양반에 대한 조롱이 매우 신랄하지만 파계승에 대한 풍자는 아직 이 지역에 불교신앙이 남아 있어서인지 약한 편이다. 다른 지방의 오광대에 비해 놀이의 앞뒤에 오방신장춤, 사자춤 같은 귀신 쫓는 의식춤이 없고, 극채색(極彩色)을 많이 쓰며 오락성이 강한 놀이들로 구성되어 있다.

탈은 예전에는 종이로 만든 탈이 특색이었으나, 근래에는 오동나무로 만든 나무탈을 사용하기도 하고 종이탈, 바가지탈을 쓰기도 한다. 주된 춤사위는 덧뵈기(탈놀이)춤인데 배역에 따라 인물의 성격이 춤으로 잘 표현되어 있고, 반주음악으로는 꽹과리, 징, 장구, 북 등 타악기가 주로 사용된다. 고성오광대는 서민생활의 애환을 담고 있는 전통놀이마당으로 중요무형문화재에 지정되어 있다.

▲과장별 내용

△제1과장 문둥북춤

내용 해설 : 조상들이 지은 죄로 인하여 자손이 문둥이가 되었다는 인과응보의 상황으로 처음에는 좌절과 절망(無言獨舞·무언독무)으로 모든 것을 포기한 듯 병마의 고통을 춤으로 표현하다가 스스로 내면의 고통을 참고 극복하며 힘차게 다시 일어나는 희망적 내용을 담고 있다. 특히 소고를 기묘하게 어르며 엇장단의 여유와 걸먹는 춤사위가 특징이다.

과장 해설 : 고성오광대 제1과장에 나오는 문둥광대라는 춤이다. 오랜 유랑으로 헤진 옷을 입고 있는데, 손가락은 자고 나면 하나 둘 떨어져 나가고 팔목은 시종일관 떨린다. 밀을 비벼 먹는데 성한 마디가 없어 좀처럼 되지 않는다. 결국 팔꿈치로 짓눌러 비벼야 한다. 그렇게 허기진 배를 채우고 흥이 있는지라 소고를 쥐려하나 되지 않자 무릎을 치며 한탄한다. 굿거리장단으로 펼쳐지는 문둥광대의 좌절이다. 이런 극적 형식이 무용적으로 잘 표현되는데 종래에는 소고를 쥐고 한바탕 춤을 춘다. 그리고 신세 한탄을 넘어 당당한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자진모리장단에서 신명으로 풀어낸다. 조이고 푸는 맛이 명확한 춤이다.
제2과장 고성오광대 놀이
제2과장 고성오광대 놀이

△제2과장 오광놀이

내용 해설 : 봉건 사회에 있어 양반들의 권세로 일반평민들을 멸시하며 천대하고 괴롭히는 그 시대의 아픔을 말뚝이라는 서민의 대변자가 등장하여 양반들의 비인간적이고 비도덕적인 그들의 추악상을 낱낱이 꼬집어 내어 신랄하게 비판하고 조롱하는 과장이다. 말뚝이의 춤사위는 천·지·인 삼재를 형상화 해 인간의 평등과 권리 회복을 염원하는 춤사위이며 큰 동작과 어깨 짓은 활기가 넘치고 역동적이라 할 수 있다.

이에 비해 양반춤은 부채로 당시의 권세를 풍자하며 선조들의 여유와 풍류를 엿볼 수 있으며 오방색깔의 화려함은 자연의 색으로서 동양의 음양오행사상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과장 해설 : 고성오광대 제2과장이다. 양반과 말뚝이는 주인과 하인의 관계인데 양반의 허울을 말뚝이가 꼬집는다. 양반의 거만한 춤짓과 말뚝이의 거친 몸짓이 잘 조화되어 있는 춤 대목이다.

제3과장 고성오광대 비비과장
제3과장 고성오광대 비비과장
 
△제3과장 비비과장

내용 해설 : 2과장에서 여러 양반들이 한창 흥겹게 놀고 있을 때 이 세상에서 무엇이든지 다 잡아먹는 괴물비비가 나타나면 양반들은 혼비백산하여 도망을 친다. 그 중 한 양반을 붙들고 마음대로 놀려대며 혼을 내어주는 이 과장은 비비가 갖은 횡포로 평민들을 괴롭히는 양반을 위협 조롱하면서 양반들의 등쌀에 쌓였던 울분이 풀리게 하는 마당이다. 특히 약육강식하는 특권 계급에 대한 보복과 징벌을 암시하고 있으며 한낱 미물인 비비도 사람은 평등하다는 생각으로 용서하는 관용의 미를 찾아볼 수 있다.

△제4과장 승무과장

내용 해설 : 속세의 연정에 이끌려 기생의 유혹에 빠져 놀아나는 파계승을 풍자한 과장이다. 제자각시가 요염한 춤으로 교태를 부리자 마음이 동한 중이 제자각시를 유인하기위해 춤을 추면서 접근하여 같이 어울려 퇴장한다. 이는 서민들의 정신적 지주이어야 한 종교가 올바른 구도의 길을 가지 않고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는 데에 대한 풍자의 내용이다. 시종 대사가 없으며 장삼의 긴 멋을 최대한 활용하여 우아하며 절제된 표현이 볼만하다.

과장 해설 : 일반적으로 승무라 하면 권번계통으로 전승된 염불, 타령 등의 장단을 쓰는 승무를 말한다. 그러나 이 승무는 권번계통의승무와는 다르게 굿거리로만 구성되어 있다. 승무의 줄거리는 수도승이 미녀의 유혹에 넘어가 파계승이 되는 과정을 묵극으로 진행하고 있다. 유심히 살피면 장삼을 놀리고 어르는 장면은 마치 권번 계열 승무의 이면을 줄거리로 풀어놓은 것 같다. 그러나 역시 탈놀이이기에 느린 장중함보다 신명에 더 치중되어 있다.
제4과장 고성오광대 승무과장
제4과장 고성오광대 승무과장
제5과장 고성오광대 제밀주과장
제5과장 고성오광대 제밀주과장
 

△제5과장 제밀주과장

내용 해설 : 작은 어미의 놀음으로 시골양반이 집을 나가 첩을 얻어 놀아나고 있는데 영감을 찾아 팔도강산을 헤매던 큰어미와 시골영감이 서로 만나게 된다. 이때 작은어미가 해산기가 있어 아이를 트는데 황봉사가 경문을 읽더니 이윽고 아이를 순산한다. 그 아이를 받아 큰어미가 품에 안고 어르나 작은어미가 시기 질투하여 실랑이도중 아이가 떨어져 죽는다. 이것을 본 작은어미는 큰어미에게 달려들어 차고 때려 죽여 버린다. 이 과장은 처첩 관계에서 빚어지는 가정비극과 죽음에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인생의 무상함을 그린 마당이다. 춤 적인 면보다 극적인 면이 강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과장 해설 : 고성오광대에서 연극성이 가장 뛰어난 부분이 제5과장 제밀주 과장이다. 치마와 저고리 사이에 배가 둥그렇게 나온 할미가 헤어졌던 남편을 찾았으나 이미 제밀주라는 첩이 있었다. 처와 첩 사이의 갈등을 허둥지둥 말리려드는 시골영감, 해산달이 되어 첩이 황봉사가 경문을 하는 사이에 득남을 한다. 처와 첩이 서로 보듬으려다 아이가 죽고 처와 첩의 다툼 끝에 할미가 죽어 상여가 나가는 내용으로 되어있다. 처첩간의 갈등이 해학적인 몸짓과 토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상여놀이

내용 해설 : 죽음에는 빈부귀천이 없고 삶을 마감한 사람을 마지막으로 보내는 내용의 상여놀이로 인생의 무상함을 표현하는 내용이다.

과장 해설 : 할미가 죽어 나가는 상여를 통한 놀이판이다. 우리네 장례가 그렇듯 하나의 축제이고 공연으로서는 뒤풀이이다. 경상도의 상여 소리와 함께 관객들이 어우러져 자연스레 뒤풀이로 이어진다.

 
고성오광대 상여놀이
고성오광대 상여놀이

▲유래와 특색

고성오광대의 역사는 조선말 고종 30년(1893년) 고성의 부사로 부임한 오횡묵의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오횡묵은 음력 12월30일 제석을 맞이하여 읍내에서 벌어진 세시행사를 목격하고 이 광경을 고성 총쇄록에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내가 풍운당을 돌아다보니 아전의 무리들이 나악을 갖추고 유희를 하고 있다” 이것이 무어냐 물으니 “해마다 치르는 관례입니다”라고 한다. 또 “오래된 관례”라는 아전의 말을 쫓아 찾아보니 오래된 문헌으로 1530년(중종25년)에 완성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서도 내용을 찾을 수 있는 아주 오래된 역사를 가진 탈놀이이다.

또한 조선말 당시 고성지방에 괴질이 크게 번졌는데 이때 남촌파 선비들이 고성읍에서 서북쪽으로 약 10km거리에 있는 무이산(청량산)으로 피병을 간 일이 있는데 그때 이들이 시조나 노래를 하고 차츰 오광대놀이를 즐겨다고 하며 고 이윤희, 고 정화경 두 분이 잘 놀아 중심이 되고 김창후 옹과 그 밖의 15~16명의 젊은이들이 기능을 배우고 연마했다고 한다.

또 1920년에는 정화경, 이윤희 명인이 나오고 이들은 김창후, 홍성락, 천세봉 명인에게 예능을 대물림한다. 그러나 당시는 일제의 식민지 상황이었으며 백성의 생활상은 수탈정책으로 인해 점차 피폐해져 가고 있었다. 해방이 되자 곧 세 분 명인은 분주히 오광대의 모임을 규합하고자 발 빠른 행보를 했다.

그 첫 열매가 해방 이듬해인 1946년에 있었다. 당시에 최신식 건물로 가야극장이 개관했는데 낙성식 기념공연으로 고성오광대놀이를 공연한 것이다. 해방 후 탈놀이가 복원된 것이 1950년 후반인 것을 감안하면 고성의 1946년 공연은 가면극 부흥의 시대를 앞당긴 매우 의미 있는 공연인 것이다.

이 시기에도 연희자 천세봉 옹은 고성오광대의 연희대본을 필사한 오광대 ‘흥유순서급자담’을 남겨 학자가 채보하기 전 연기자의 손에 의해 문자로 기록된 보기 드문 성과를 물려주게 된 것은 고성오광대 전승에 대한 지속적인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이후 1964년 중요 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됐고, 전국민속예술 경연대회에서는 1973년 국무총리상, 1974년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그리고 지금은 한국을 대표하는 탈춤으로서 현존하는 영남형 탈춤 중 가장 그 원형에 가깝게 전승되고 있으며 극보다는 춤이 월등히 앞서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성오광대를 지켜가는 사람들

△예능보유자=이윤석 △전수교육 보조자=최금용 이재훈 이호원 이태영 △이수자=이도열 이영상 정채승 전광열 하현갑 김창근 황종욱 남진도 김동수 김성범 윤현호 최영호 허창열 안대천 최용권 △전수자=고석진 강경미 허현미 △전수생=권의헌 김용훈 김은정 김진숙 박종완 배정찬 선영욱 손혜정 양준영 음대진 이다빈 이돈근 이상영 이창훈 최민서 하갑영 황민왕 허태성

홈페이지 : www.ogwangdae.or.kr
자료·사진 제공=고성오광대보존회·(사)경남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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