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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의 길, 정약용을 따라 오르다경남일보 선정 100대 명산 <71>강진 만덕산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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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09.27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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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오르는 길
18년의 유배생활, 풍찬노숙 다산도 이길을 올랐을까.
 
 
 
다산이 떠난 지 200여년이 지났지만 강진 땅은 아직도 그의 생애와 업적이 관통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다산 정약용(1762~1836)탄생 250주년을 맞아 그를 기리는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그는 1801년 강진에 유배돼 만덕산 기슭 초당에 10년 등 18년을 살았다.

유배되기 전 정조대왕 시절 승승장구 잘나갔다. 1792년 수찬 재직 시 거중기를 만들었고 서양식 축성법으로 수원성을 건축했으며 한강 배다리도 설계했다. 그러나 자신의 최대 후원자이던 정조가 1800년 갑자기 세상을 뜨자 이듬해부터 고난의 일생으로 접어든다.

일찍이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로 ‘서학’에 관심을 가졌으나 오히려 이런 연유로 1801년(순조 1) 신유사화 때 멸문지화(滅門之禍)에 버금하는 화를 입는다. 형 정약종이 극형에 처해졌고 매형 이승훈도 참살을 면치 못했으며 큰형 정약전도 흑산도로 유배됐다. 자신은 목숨만을 겨우 부지한 채 강진 땅에 유배돼 18년 동안 풍찬노숙 영욕에 찬 삶을 이어간다. 정약용의 가족은 한마디로 박산이 났다.

천재적인 인물은 이런 때 표시가 나는 모양이다. 좌절하지 않았고 만덕산 기슭 초당에서 주변 사람들을 불러 모아 강학하며 청빈한 삶을 살았다. 이런 고통은 ‘필시 하늘이 내게 내려준 기회’다고 여긴 것이다.

이곳에서 최대의 걸작이자 저술서 목민심서 경세유표 흠흠신서가 탄생한다. 세월에 매진한 수학의 결과로 해배전년(1817)에 경세유표, 해배년에 목민심서, 그 이듬해 흠흠신서가 착착 세상 빛을 보게 된다. 그 중 목민심서는 망조 든 조선후기 관리들의 폭정실태와 거기에 찌들어가는 민생을 결부시켜 지방관리가 지켜야 할 지침을 기록한 명저이다. 해배 후 쓰여진 첫 작품이다.

예부터 명산에는 명사들이 깃들었다. 요즘으로 치면 ‘힐링’ 즉 초야에 묻혀 유유자적한 면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다산이 기거했던 만덕산과 초당은 그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귀양살이에 그저 초립같은 집에서 복사뼈 문드러지는 학문에만 열중했다.

그가 머문 자리에 아름다운 길이 있다. 초당에서 백련사를 연결 하는 800m짜리 오솔길은 다산의 길이다. 학문에 정진하면서도 백련사 학자승 혜장과 교유했다. 혜장과의 인연은 ‘실학과 불교의 만남’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 그들이 머문 이 길은 구도의 길이자 철학의 길이다. 가끔 만덕산에도 올랐을 것이다. 어느 시기엔가는 가깝게 보이는 명산 월출산에도 초의선사와 같이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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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첫봉우리 암릉.
멀리 뒷편이 만덕산 정상 깃대봉이다.
 

▲만덕산(412m)은 전남 강진군 도암면 봉황리에 위치한다. 남으로 기암괴석과 절벽이 많고 동백 푸조 삼나무 등 상록 활엽수가 많다. 다산초당이 있다. 만덕은 고려 이전부터 불린 산 이름이다. 정약용의 산, 호사롭지 않은 다산초당과 백련사를 품은 만덕산이 추석 연휴 마지막 날 100대명산에 들어왔다.

▲산행코스는 용문사→석문공원 갈림길→290봉→만덕광업채광지갈림길→암릉→임도→바람재→만덕산 첫봉→갈림길→만덕산정상→백련사→다산초당 휴식포함 6시간 소요됐다.

▲오전 9시 35분 강진에 닿은 취재팀은 용문사 입구에 세워진 ‘정다산 유허지 통로’ 입석 앞에서 등산화 끈을 조였다. 촌가 사이 넓은 길을 따르면 용문사. 성근 흰바위들 사이에 절이 위치하고 있다. 용문사 토불은 고려 때 작품으로 절집 별원에 모셔져 있다.

대웅전에 한글로 쓴 ‘큰법당’ 횡액이 눈길을 끈다. 절집 왼쪽 산으로 연결된 등산로에 붙는다. 뒤로는 석문공원, 18번 도로, 그 너머 석문봉, 강진만을 등지고 된비알을 오른다.

출발 30분만에 능선 갈림길. 백련사 5.23km, 석문공원 방향 600m(왼쪽)를 알리는 이정표가 숲에 걸려 있다.

이후 두번째 갈림길에서 오른쪽은 만덕광업채광지로 내려가는 길이다. 산허리가 잘린 채광지는 하늘을 향해 붉은 황톳빛 아귀를 벌리고 있다. 더욱이 그 아래 붉게 녹슨 한국유리 공장의 지붕까지 오버랩 되면서 산기슭은 을씨년스럽다.

한국유리는 채광지에서 유리 원료를 채굴해 각 지역 공장에 공급하는데 문이 닫혀 있는 것으로 봐서 가동이 여의치 않은 모양이다.

1시간 30분이 지나면서 암릉이 나타난다. 암석들은 철 성분이 많은 탓에 붉은 빛이 돈다. 바다와 강진만을 끼고 있는 만덕산 수림은 울창하지 않다. 나무꼴이 가난한 집 보릿고개 겨우 넘긴 아이처럼 키가 작고 비쩍 말랐다.

산행 중에는 남쪽 초가을 볕을 등진 탓에 등과 목이 따갑고 바람마저 불지 않아 힘겨운 산행이 계속된다. 땀은 지속적으로 나는데 곧바로 말라버려 손으로 훔치면 소금알갱이가 버석인다.

출발 2시간 만에 숲길이 끊어지고 300m짜리 임도. 그 끝에 허물어져가는 예비군 초소가 있고 주변에 오래 돼 기능을 잃은 안테나가 폐쇄될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목마른 산행. 2시간 30분 만에 이름이 반가운 바람재. 허리춤까지 닿는 성성한 고사리밭이다. 왼쪽은 임도, 오른쪽은 만덕산기도원으로 하산하는 길. 정면이 만덕산이다. 재와 산의 경계가 확연해 벽같이 곧추 선 바위틈으로 기어올라야 산에 붙을 수 있다.

이때부터 지나온 산 실루엣이 특이해 앞보다는 뒤돌아보며 오르는 재미가 있다. 오늘 산행 들머리 부근에 석문봉이 우뚝하고 그 뒤에 이와 똑같은 세개의 봉우리가 또 있다.

바람재에서 20분 만에 만덕산 첫 번째 암릉봉우리를 만난다. 주변의 풍광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대한 바위군이다.

강진만과 만덕호가 짙푸르고 그옆 들녘은 황금색으로 채색되고 있다. 영암 쪽 내륙의 허연 기암은 월출산. 그 형상이 도열한 병사의 칼날과 화살촉 같다.

여기 어디쯤에서 다산은 월출산 산행을 바랐을 것이다. 그는 두륜산 대흥사에 있던 다성 초의 선사와 함께 이 산을 올랐다.

이 암릉에서는 길이 헷갈린다. 앞에 보이는 산으로 바로 가는 길이 없고 능선에서 10여m 내려선 뒤 좌측으로 큰 바위뿌리를 돌아올라야 한다.

3시간 20분만에 만덕산 정상 깃대봉에 닿는다. 암석지대에 낮은 관목이 주류여서 앉아 쉴만한 그늘이 도통 없다. 정상석은 하늘 향해 드러누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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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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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불교자정운동의 하나인 백련결사 요람 백련사
혜장은 이곳에 살면서 800m 떨어져 있는 초당의 다산과 교류했다.

발아래는 이산 최고의 경지 백련사가 보이고 더 멀리 내륙으로 깊숙히 들어온 강진만 농지가 가을볕에 타들어가고 있다. 정상 갈림길에서 직진해 2.6km 더 가면 옥련사, 오른쪽으로 하산하면 목적지이자 날머리 백련사와 다산초당에 닿는다.

백련사 주재 문화해설사는 “통일신라 말 839년 무염스님이 창건했다. 고려 때 불교자정운동의 하나인 백련결사의 요람이다”고 설명했다. “고려 때 융성했고 조선시대 억불로 쇠퇴했다가 1430년 동생(세종)에게 왕위를 넘긴 효령대군이 이 절에 오면서 다시 융성했다”고 덧붙였다. 효령은 여기서 8년을 거처했다. 대웅보전 편액은 원교 이광사가 쓴 글씨, 술 취해 쓴 것같이 삐뚤삐뚤해 일명 취서체로 부른다.

백련사에서 다산 초당가는 길은 다산과 혜장이 교류한 철학의 길이다. 동백·푸조·후박·차나무가 숲을 이룬다. 둥치 큰 동백은 400년을 훌쩍 넘긴다. 동백이 끝나면 산죽과 차나무가 어우러진 오솔 길. 호젓하고 아름답다. 동백림은 천연기념물 151호이다.

학식 높은 두 천재는 유배와 유랑의 언저리에서 서로를 갈망하며 신학문을 추구했다. 해월루 갈림길을 넘어선다. 초당 쪽 길 옆 강진만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이름을 가진 천일각이 있다. 다산이 흑산도에 유배된 형 ‘약전’을 한없이 그리워하며 눈물로 바라봤을 터이다. 당시에는 없었지만 최근 강진군에서 만들었다. 이 길은 그렇게 전설이 돼가고 있다.

돌아서 500년 수령 소나무 옆으로 다가가면 ‘동암’. 문 위에 2개의 편액이 걸려있다. 좌측 ‘보정산방’은 추사의 친필 모각, 오른쪽 ‘다산동암’은 다산의 글을 집자한 것이다. 다산은 동암에서 복사뼈가 문드러질 정도로 학업에 정진했다. 50m를 더 가면 다산초당 편액이 걸린 메인 한옥이 보인다. 옛날에는 초가였으나 기와가 얹혀 있다. 2개의 방, 영정이 걸려 있고 단출한 책상이 놓여 있다. 문가 기둥에 ‘새벽서당 물소리 듣는다’는 한자가 걸려 있다.

마당 옆 연못은 연지 석가산이다. 연못 중앙에 다산이 직접 돌을 주워 쌓아 산을 만들고 물고기를 키웠다. 해배 후 그는 남은 제자들에게 연못에 키웠던 물고기의 안부를 물었다 한다. 철저한 자연주의자였음을 알 수 있는 대목. 이 외에도 마당에 ‘다조’가 있고 뒷마당에 ‘약천’이 있다.

최고의 볼거리는 초당 뒤 언덕배기 바위에 있다. 그가 직접 남긴 ‘정석’이라는 글씨. 수식 없이 자신의 성 ‘정(丁)’자를 새겼다. 심플과 심플라이프의 표식이다. 서암앞을 지나면 편백나무숲 향이 바람에 실려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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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의 심플함을 보여주는 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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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덕산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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