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USE 말고 HOME
HOUSE 말고 HOME
  • 경남일보
  • 승인 2013.10.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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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민지 (아동복지전문기관 홍보담당)
나는 집이 없다. 고향집을 떠나온 지 10년, 학생 딱지를 떼고 직장인 딱지를 붙인 지 4년. 여전히 월급이 들어오고 이틀이면 월세가 빠져나가며 보증금의 80%는 엄마 돈인 원룸에 살고 있다. 중학교 땐 또래의 아이들처럼 ‘내 집 꾸미기’에 대한 로망이 있었다. 인테리어와 벽지의 디자인 따위의 것들을 상상하는 것이 행복했다. 그런 로망은 개미가 들끓고, 마음이 맞지 않는 룸메이트를 견뎌야 했던 하숙집에 들어간 17살 무렵 사라졌다. 나에게 벽지 무늬를 직접 고를 수 있는 자유 같은 것은 주어지지 않았다.

지금의 집도 내게 취향을 고민할 여지를 주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지만 이제 그런 것은 별로 상관이 없다. ‘서울시내 아파트의 전세값’이란 말이 대한민국 기혼 남녀에게 주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생각하면, 그 스트레스에 동참할 날이 머지않은 내 나이를 생각하면 4년째 월세가 오르지 않는 내 방에게 절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다. ‘집’은 이제 벽지나 커튼의 무늬를 고민해야 하는 로망이 아니라 현실의 결정체가 됐다.

대한민국에서 ‘집’은 그야말로 근심거리다. 집을 가진 자들은 ‘하우스푸어(house poor·내집빈곤층)’가 내 얘기가 될까봐 전전긍긍하고, 전세를 사는 사람들은 2년마다 피가 마르며, 월세를 사는 사람들은 돈이 모이지 않아 월세를 벗어날 수 없는 악순환에 시달린다. 내 집 마련에 일생을 바치는 사람들, 집 때문에 인생 2막을 빚으로 시작하는 사람들, 집 때문에 서러워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요즘 우리 기관에서 주거 빈곤아동을 위한 최저 주거기준 개선을 위한 서명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최소한의 건강도, 안전도 보장받을 수 없는 집에서 갖은 위험에 노출된 채 사는 아동들을 위한 주거정책을 마련해주기 위한 캠페인이다. 대표사례로 선정된 아이는 무허가 컨테이너에서 몸이 아픈 아빠와 단둘이 살고 있는 아이였다. 컨테이너 집마저도 당장 비워야 하는 부녀를 위한 모금을 하려고 아이의 집에서 촬영해온 사진들을 살피는데, 어쩐지 부끄러움이 밀려 왔다. 아이의 표정이 너무나 해맑아서, 그 허름한 방의 벽을 가득 채운 아이의 그림들이 사랑스러워서, ‘한○○ 아빠와 한△△ 딸의 집입니다’ 문에 삐뚤삐뚤 써놓은 낙서가 퍽 정겨워서.

집이라는 환경이 아이를 불행하게 했을 것이라 생각했던 나의 기준이 부끄러웠던 것이다. 아이들에게 ‘집’이란 건 부의 척도도, 인생을 옭아매는 짐도 아니다. 가족이 꿈을 키우고 함께 살아가는 보금자리, ‘가정’ 그 자체이다. 어린 시절, 내가 ‘집’이라는 단어에 떠올렸던 건 ‘가족이 머무는 공간’이었지 ‘부동산’의 의미는 아니었던 것처럼. 미래의 내 아이가 집이 영어로 뭐냐고 묻는다면 HOUSE가 아니라 HOME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 ‘주택’에 대한 정책만 있어 왔던 대한민국에 약자들의 ‘주거’를 위한 정책이 생겨나기를 바란다.

강민지 (아동복지전문기관 홍보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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