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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1)<32> 김상훈 시비와 거창문인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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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3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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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71)
<32> 김상훈 시비와 거창문인들(2) 
 
‘김상훈 시 전집’(박태일 엮음, 세종출판 간))이 시비가 건립되는 비슷한 시기(2003년 8월 15일)에 나왔는데 모두 6부로 편집되어 있다. 제1부 초기시편과 ‘전위시인집’, 제2부 대열, 제3부 가족, 제4부 가족 이후, 제5부 ‘흙’과 재북 시편, 제6부 시집 서,발문과 기타의 순으로 엮어졌는데 시인의 창작 시기에 좇아 모두 109편이 실렸다.

박태일 시인은 전집 머리말에서 “이제 광복기의 질풍노도를 온 몸으로 안고 뒹굴다 먼 북녘 땅에서 숨져간 한 젊고 명민했던 시인의 전집을 묶는다. 어찌 두터운 감회가 없다 할 것인가. 다행히 시절 인연이 닿아 시인의 고향 일부리에 시비가 세워지는 일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는 보람된 기회가 있었다. 그리하여 시전집을 함께 묶어내고자 하는 조바심을 굳이 참지 못했다. 오래도록 한국문학과 거창문학의 우뚝한 느낌표로 김상훈 시비는 남을 것이다. 가조 들 종달새는 봄마다 시인의 시 구절을 물어 올릴 것이다.”라 썼다.

김상훈의 약력은 다음과 같다. 거창 가조면 일부리 662번지에서 1919년 김채완의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서 백부인 광복지사 김채환의 양자로 들어간 시인은 1934년 가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936년 서울 중동학교에 입학하였고 1937년에는 임봉조와 혼인하였다. 1941년부터 연희전문학교에서 수학하며 문재를 떨쳤던 시인은 1944년 원산철도공장으로 장용에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었고 협동당 별동대 일로 일제 감옥에서 옥살이를 했다. 을유 광복으로 출옥한 뒤 문학가동맹에서 활동을 하다가 1950년 국민보도연맹에 들었다. 그러나 6.25를 거치면서 북녘에 머물게 되어 1987년 영면한 것으로 알려졌다.

시인은 광복기에 시집 ‘전위시인집’, ‘대열’, ‘가족’, ‘중국역대시선’ ‘푸시킨 시집’을 냈고 북쪽에서도 몇권의 저서를 내었는데 앞으로 김상훈 연구는 경남의 최서북단에 있는 거창의 문학적인 힘의 원천으로 작용하면서 외진 곳이 반드시 외진 곳이 아니라는 점을 실증해 보여주리라 기대하게 된다.

시비를 둘러본 뒤 일행은 김상훈 생가가 있는 일부리 ‘부산(釜山)’ 마을로 향했다. ‘가마부(釜)‘자를 쓰는 마을은 어김없이 온천이 나온다는 설이 그대로 맞아 떨어지는 부산마을, 그렇지만 직할시 이름과 같아서 마을을 돌면서 정서적으로 불편한 느낌이었다. 길가 부근에 흐르는 개울이 있었는데 그 개울 이름이 ’더우내‘였다. 온천이라는 뜻이다. 첫집 어우름에서 표시인이 반대쪽 밭에서 일하고 있는 노인에게 ’형님‘ 하고 불렀다. 반갑게 맞아주는 노인. 그분은 표시인의 이종사촌 형님이었는데 팔순을 훨씬 넘어선 한학자요 한시인(漢詩人) 김성훈(金成勳) 선생이었다. 선생은 김상훈 시인의 10촌 동생이었고 마을 첫집의 주인이었다.

김선생은 먼저 우리를 김상훈 시인의 생가로 안내했다. 생가는 앞뒤집 두 집이 해당되는데 앞집은 ‘사우당’(四友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었다. 시인의 고조 4형제를 모시는 집이라는 뜻으로 ‘사우당’이라 이름 붙인 것이었다. 그 안쪽에는 큰 비 하나가 서 있는데 ‘商山金氏四公遺蹟碑’라 적혀 있었다. 비는 시인의 맏아들 김종철(鍾喆) 곧 ‘사공’의 5대손이 세웠다. 5대손은 종철, 종식, 종국, 경애, 경숙 등이다. 사우당 뒷집에 종철이 살고 있었는데 출타하여 만나보지 못했다. 사우당 현판 글씨는 곽면우 선생이 거창 가북으로 은신해 들어올 때 함께 들어왔던 문인 김정수가 썼다.

김상훈 시인의 생가를 방문한 뒤 그 옆집으로 우리를 인도한 김성훈 선생은 대문이 열려 있는 한 집으로 무작정 들어가면서 홍종기, 표성흠 시인과 필자에게 “알 만한 집이니 들어와 보세요”하고 재촉했다. 그 집은 전 경남도지사 김태호 의원의 생가라는 것이었다. “이 집에 들어가 볼 이유가 없는데.....”하고 생각하는데 김성훈 선생이 “교수님 일행입니다.” 하자 의원의 어머니가 아래채 부엌에서 불을 지피다 말고 허리를 펴고 일어서셨다. 필자는 의원의 어머니께서 의원을 닮았으리라 생각하며 가만히 들여다 보고는 인사를 드렸다. “안녕하십니까. 젊었을 때 많이 미인이셨지요?” 하자 “미인은 무슨........”하고 머리를 긁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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