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누님같이 생긴 꽃
내 누님같이 생긴 꽃
  • 경남일보
  • 승인 2013.11.2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황숙자 (시인)
도솔암 스님께서 국화차를 보내 오셨다. 올해 첫 덖음한 차맛은 새벽 찻물처럼 청정하여 정신이 화들짝 깨어 나는 아픈 각성과 그득한 감동이 밀려온다.

암자 주변 야트막한 산 언덕과 샂갖 아래 한 마지기 무논에다 심은 국화를 서리가 내리기 전 서둘러 채취하였다고 한다.

국화차는 머리와 눈을 맑게 하고 아침저녁으로 마시면 더욱 좋으니 스트레스에 시달리지 말고 마음 접히지 말고 편히 살라고 한다. 향으로 마시고 눈으로 마시고 마음으로 마시는 차 한 잔이 스님의 무보시 마음을 대하는 듯 편안하고 부드러웠다.
중국의 주유자는 국화를 달여 마시고 몸이 새털처럼 가벼워져 끝내는 승천하여 신선이 되었다고 전한다. 술과 국화의 시인 도연명도 "동편 울타리 밑에서 국화를 따다가 우두커니 남산을 바라본다"고 자연에 묻혀 사는 군자의 고고함을 절창하였다. 국화가 자신의 고결함을 지켜줄 수 있다고 믿어 국화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매화가 가장 먼저 피는 꽃이라면 국화는 시절 중 가장 늦게 피는 꽃이다. 모란이 세속적 부귀를 상징하는 꽃이라면 국화는 인고와 절개를 상징하는 꽃이다. 차가운 서리를 맞으면서 바람결의 낙엽을 바라보면서도 꿋꿋하게 피어나기에 은둔하는 군자의 자화상으로 묘사되어졌다. 이규보는 서리를 견디며 한 해의 끝자락까지 피어 있는 국화를 보고 너만이 절개를 지킨다고 칭송하였다.

"그립고 아쉬움에 가슴 조이던/머언먼 젊음의 뒤안길에서/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내 누님같이 생긴 꽃이여." 미당의 '국화옆에서'는 전 국민적인 애송시가 되어 있다.
세월의 풍상과 더불어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마침내 인생을 관조하는 원숙한 누님의 이미지를 닮은 꽃.
세상사 이해 못할 것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 없는 품속 넉넉한 누님같이 기다림과 참는 법을 가르쳐 주고 깨달음을 주는 꽃이다. 국유황화라더니 노랗고 탐스러운 국화의 기품이란 분명 누님의 품격일 것이다. 고단하고 애잔한 삶도 아름답게 빛이 나는 법이다.

진주시 농업기술센터에서 주최하여 매년 열리고 있는 진주 국화전시회. 대륜대작, 현애작, 입국작, 분재작 등 5만여점의 다양한 국화를 감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봄부터 가을까지 아침저녁으로 손톱 밑이 닳아지도록 벌레 잡고 물 주고 갖가지 모양의 화형의 틀을 잡아 키우기까지 애쓰신 분들의 정성과 노고가 짐작되어져 감탄과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들었다.
국화의 향연 사이에서 진주문협의 시화전, 학생들과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국화사랑 백일장과 그림그리기대회가 함께 열렸었다. 한 편의 글과 그림을 완성하기 위한 창작의 고통이나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땀 흘리는 생명탄생의 자리는 다를 바가 없다.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고 천둥은 먹구름 속에서 치고 밤새 무서리는 또 그렇게 내리는 인고의 과정 없이 성숙한 작품의 개화는 요원한 일이다.
전시회가 열리고 있는 진주종합경기장은 국화와 시로 가을 정취의 절정을 이루고 나들이를 나온 사람들로 축제의 장이었다. 더불어 향기로운 국화차를 준비하여 관람객들에게 대접하니 따뜻한 정이 흐르고 흐뭇한 정겨움이 있었다.

만추의 낭만을 국화 향기와 함께 만끽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가을하늘처럼 여유롭고 곱게 물든 단풍나무처럼 설렜다.
세상에 난 무수한 길 가운데서도 내 안에 난 길을 비루한 흔적 없이 제대로 찾아가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먼 길인지 국화를 보고서야 깨닫는다.
비록 한 송이의 꽃을 피우는 것이라도 인연과 기다림은 우주의 자연법칙에 기인하는 것이리라. 그윽한 국화향기에 천천히 매료되어 자꾸 얼굴을 가져다 흠흠거린다. 배추밭에도 무밭에도 입동이 지나니 서리가 가득하다. 서둘러 겨울이다.
 
황숙자 (시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