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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격축구 펼치던 '왼발의 달인' 부드러워졌다<경남축구열전> 하석주 전남드래곤즈 감독
박성민  |  smworld17@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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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3.12.0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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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만큼 파란만장하고 욕도 많이 먹은 선수가 있을까요”

‘왼발의 달인’, ‘월드컵 비운의 스타’ 등 많은 수식어가 붙어다니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또 한명의 경남출신 축구영웅이 있다. 특유의 비행기 세러머니로 팬들을 사로잡았던 하석주 전남드래곤즈 감독. 사상 첫 월드컵 선제골의 주인공이자 그로 인해 아픔도 맛봐야 했던 그를 전남드래곤즈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다.



◇ 눈물의 첫 국가대표팀 발탁

경남 함양 출신인 하석주는 4살때부터 상경해 서울에 정착했다.

“함양에는 아버지와 형님이 납골당이 계셔서 1년 한번씩 정도 가게되죠. 일찍부터 서울생활을 하는 바람에 고향에 친구가 없는 게 제일 아쉬워요”라고 말하는 하 감독은 태어난 고향 함양을 찾을 때마다 아쉬움이 많단다. 서울 신창초등학교 4학년때 육상을 시작했던 그는 어릴때부터 축구에 관심이 많았다. 동네에 있는 성북초등학교가 축구부를 창단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곧바로 지원하면서 축구인생은 시작됐다. 성북초등학교 축구부가 6개월 만에 해체되는 비운를 맞았지만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축구명문 숭곡초등학교로 옮기게 된다. 이후 서울 경신중학교와 광운전자공업고로 진학하면서 축구인생은 계속 이어진다.

“보통 축구부원들은 경신중-경신고 순으로 진학하는데, 저희 때에는 뿔뿔이 흩어졌죠. 저는 광운전자공업고가 집과 가까워 지원하게 됐죠”라며 광운전자공업고 축구부에 들어가게 된 이유를 설명했다. 고교졸업 후에는 광운대가 아닌 아주대로 방향을 튼다. “아주대가 막 창단을 시작해 투자를 활발히 진행하고 선수들에 대한 지원이 좋았어요. 축구명문으로 발전하는 곳에 가고 싶어죠”

그때까지만 해도 서울시 대표 1회, 대학선발 1회에 그치며 평범한 선수였으나 그는 프로입단 입단 후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대우의 호화멤버 속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유감없이 드러냈다. 1991년 화려한 축구인생이 열린다. 당시 그는 유럽 레드스타와 친선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비행기안에서 대표팀 발탁소식을 접한다.

“대표 1진 청룡, 2진 백호가 있었어요. 대표팀 경험이 전혀 없었지만 리그 FA컵 우승당시 득점도 하고 MVP를 타서 내심 백호팀 정도는 기대하고 있었는데 명단에 제가 없는거에요. 너무 실망했죠. 그런데 대표 1진인 청룡팀에 내 이름이 있었어요 그때 처음으로 보던 신문을 들고 화장실가서 기뻐서 울었죠”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그렇게 국가대표와 인연을 맺은 하석주는 2001년 대표팀 은퇴까지 A매치 95경기를 소화하며 한국축구 부동의 윙백으로 자리매김한다.



◇ 한 단계 성숙하게 만들었던 프랑스 월드컵

공간 침투가 빠르고 스피드와 지구력이 좋았던 하석주는 공격성향도 강해 왼쪽 윙백으로는 높은 득점력을 자랑했다.

프리킥의 정확성은 물론 예리함도 갖추고 있어 그에게 ‘왼발의 달인’이라는 별명이 이때부터 생겨났다. 1990년 프로축구 대우로얄즈에서 데뷔한 그는 8년동안 리그를 누비며 2번의 우승을 일궈내는 주역으로 축구인생 황금기를 맞는다. 특히 1997년에는 3관왕을 차지하는 영광까지 안는다. 이후 하석주는 일본 J리그에 진출해 세레소오사카, 비셀고베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고 2003년에는 포항으로 돌아와 플레잉코치를 겸하며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그는 두 차례 월드컵과 96년 올림픽, 아시안컵 등 굵직한 대회를 빠짐없이 참가했다. 또한 국가대항전에서 대표팀 왼쪽의 자리는 항상 그의 자리였다. 그런 그에게 시련도 찾아왔다. 프랑스월드컵 멕시코전이다. 멕시코전에서 선제골을 넣은 후 퇴장되는 불운을 겪게 된다. “선수생활을 하면서 퇴장명령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어요. 1998년도 백태클 규정에 대해 대처를 잘 하지 못한 제 잘못이었지요. 마음 고생이 정말 심했지만 많은 팬들께서 격려해주신 덕분에 빨리 일어날 수 있었어요”라며 당시 팬들의 격려에 대한 감사함을 지금도 잊지않고 있다고 한다. “축구를 하면서 그런 상황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해요”고 말하는 그는 2000년 잠실에서 열린 한·일 친선전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마음의 짐을 한결 벗어 던질 수 있었다.



◇ 한국의 ‘도르트문트’를 꿈꾸다

해외진출 후 포항에 둥지를 튼 하석주는 플레잉코치를 시작하며 지도자로서 축구인생을 개척했다.

2005년에는 박항서 감독과 함께 경남FC 코치에 합류해 경남에서 축구인생을 펼쳤다. “창단 당시 선수수급 부분에서 혜택을 받지 못했지만 2년차부터 국내선수들과 까브레와 같은 좋은 용병으로 상위권 성적을 냈죠. 그때까지만 해도 코치로서 경험이 많이 부족했지만 선수시절 주장을 주로 경험했기 때문에 문제는 없었어요. 선수들과 감독님 사이 중간적 위치에서 어떻게 하는지 잘 배울 수 있었죠”라고 말하는 하석주는 경남FC에서의 지도자 생활이 지금 감독생활에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고. 경남에서의 박항서 감독과 인연은 전남에서까지 이어진다. 경남FC에서 2008년 전남드래곤즈 코치로 부임한다. 2010년까지 전남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했다.

이후 2011년에는 모교인 아주대 감독으로 부임, 후배들을 가르치면서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그에게 전남으로부터 긴급 호출을 받게 된다. 2012년 전남은 강등 위기에 처할 정도로 성적이 부진했다. 위기에 빠진 전남을 구하기 위해 지난해 8월 전남감독으로 취임했다. “당시 부임해 보니 팀이 많이 망가진 상태였어요. 2무 9패의 성적과 0-6 패배 경기가 분위기를 말해주고 있었죠. 그래도 기존의 선수들과 함께 최선을 다해 강등 경쟁에서 살아남았는데…”라며 당시 어려웠던 상황을 회상하듯 얼굴 표정이 상기됐다.

그리고 올해에도 하 감독은 아쉬움이 많다. 올해 예산부족과 선수확보에 실패하면서 다시 하위권에 머물고 있기 때문이다. 올 시즌 전남은 초반부진을 극복하고 강등권팀들과 격차를 벌이는 듯 했으나 후반기 막판 5연패에 빠지기도 했다. “어린선수들이 많다 보니 한 번 무너지면 잡아줄 사람이 없어요. 최악의 상황에서 2연승을 거둬 한 숨을 돌렸지만 이대로 부족합니다”면서 올 성적에 대해 아쉬움을 나타냈다.

“독일 분데리스리가 도르트문트처럼 빠르고 소프트한 축구를 전남에서 펼치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 겨울에 알찬 선수들을 찾아야죠. 내년 시즌은 올해와 달리 초반부터 승부를 걸고 치고나가 중위권 이상으로 올라가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어요”라고 하 감독은 베테랑과 용병 영입을 강조하며 2014시즌 청사진을 제시했다.

하 감독은 끝으로 팬들에게 당부의 말도 남겼다. “업다운 강등제는 정말 재미있는 시스템이에요. 팬들께서도 응원하는 팀이 2부 떨어져다고 해서 외면하지 마시고 우리팀이라는 애정을 갖고 응원해주시고 좋겠어요. 그러면 한국축구 K리그 팀이 자연스럽게 좋아질 겁니다”



하석주는

출생= 1968년 2월 20일 경남 함양
학교= 숭곡초교-경신중학교- 광운전자공업고등학교- 아주대학교
선수경력= 대우로얄즈(1990~1997), 세레소오사카 (198), 비셀고배(1998~2000), 포항스틸러스(2001~2003)
월드컵대표(1994, 1998), 애틀란타 올림픽대표(1996), AFC 아시안컵 대표 (2000),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표 (2001)
지도자경력= 포항 스틸러스 코치(2003 ~ 2004), 경남FC 코치(2005 ~ 2007), 전남 드래곤즈 코치(2008 ~ 2010), 아주대학교 감독 (2011 ~ 2012), 전남 드래곤즈 감독 (2012.08~현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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