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28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28회)
  • 경남일보
  • 승인 2013.12.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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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3. 무인에의 길
세월은 백전천 물살에 해를 담고 달을 실은 채 쉼 없이 흐르고 흘러갔다. 냇가에 있는 거북바위와 두 그루 고목도 그만큼 늙어 보였다.

시민의 나이 어언 스무 살 되는 해, 혼례를 치렀다. 신부는 부여 서씨 응문의 딸이었다. 혼자일 때보다 둘이 되니 신경 쓸 것도 많아지고 해야 할 일도 불어났다. 나팔꽃 피어나는 여름날 아침인가 했더니 금방 하늘가에 기러기 비껴가는 늦가을 황혼이었고, 오른쪽 둥근 상현달이 다시 보니 눈썹을 닮은 초승달로 바뀌어 있었다.

하지만 어쩐 셈일까? 이태가 지나도록 태기가 없었다. 금실이 남달랐기에 어머니 이씨 부인의 조바심은 더할 나위 없이 컸다. 은행나무도 암수가 마주서면 열매를 맺는 법인데,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시민은 서책을 넘기고 무예를 연마하는 일에 더욱 빠져들었고, 서씨 부인은 남편과 시댁 어른들 앞에서 고개를 들지 못했다. 어쩌면 영원한 돌계집(석녀)으로 밤낮 눈물을 뿌리며 살아가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심지어 이혼의 구실도 되고, 남편이 다른 여자를 더 맞이할 수도 있으니, 합방을 할 수 없는 여자나 진배없었다.

그런데 눈 위에 서리라던가. 최고 웃어른인 충갑이 돌아가시고 말았다. 근조(謹弔)의 망극한 슬픔 속에 망자(亡者)가 생전에 쓰던 물건들을 한데 모아 불사르니 그 연기가 풀어헤친 유족들 머리칼같이 나부꼈다. 온 고을이 고인을 추모하는 공기로 그득했다.

시민이 고자(孤子)로서 더욱 가슴 쓰라린 일은, 당신이 손주 한번 품에 안아보지 못한 채 이승을 뜨시게 한 불효막심에 대한 죄책감이었다. 과수댁 이씨 부인은 자식들 앞에서 내색은 하지 않아도 지난날들의 회억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그들 모자의 머릿속에 이승에서의 지아비이자 부친인 충갑의 생애가 깊이 자리 잡았다. 그가 재직한 사헌부는 사간원, 홍문관과 함께 삼사(三司)라고 불리었는데, 권력자들도 벌벌 떨게 만들었고 백성의 원억한 일을 해결해 주기도 하는 등 막강한 곳이었다.

충갑의 운명이 뒤바뀐 것은, 을사사화의 여파가 가시지도 않은 1547년 경기도 광주 양재역에서 발견된 어떤 익명의 벽서였다. 정미사화라고도 하는‘양재역벽서사건’이 그것이었다. 윤원형 등의 소윤 일파가 대윤 윤임파의 잔당과 사림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고의적으로 정치 쟁점화 했던 것으로 전해지는 정적 숙청 사건.

문정왕후는 명종으로 하여금 많은 이들을 죽이거나 귀양 보내게 했고, 중종 아들인 봉성군도 역모의 빌미가 된다는 핑계로 사약을 내렸다. 그 와중에 평소 수렴청정을 하는 문정왕후에게 비판적이고 바른말 잘하던 충갑도 무사할 수 없었다. 그는 청주 땅으로 유배당했다. 이제 남은 것은 허망하고 고통스러운 시간들뿐이었다.

그런데 시민의 외조부 이성춘이 더 대단했던 것은, 귀양살이하는 충갑이 그때 총각이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비록 홀아비로 4년을 살아오긴 했지만, 그에게는 죽은 첫째부인 광주 김씨가 있었고, 더욱이 시회(時晦)라는 아들까지 둔 몸이었다.

그런 사실을 하나 빠짐없이 죄다 알고 있던 성춘. 그는 여러 관아에 둔 종9품 벼슬인 참봉으로 말단 관리였지만 대단한 재력가였다. 못과 정자가 멋진 넓은 소유지의 임자일 뿐 아니라, 잔치 때 불러내올 가무에 능한 기녀들까지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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