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30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30회)
  • 경남일보
  • 승인 2013.12.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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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3. 무인에의 길
이씨 처녀는 쌀이며 농기구, 그외 여러 물품 등속을 보관해놓은 집안의 광과 곳간이 생각났다. 어머니는 곡식을 저장하는 곳간을 특별히 관리한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나도 시집가면 어머니처럼 오로지 집안 살림에만 신경을 쏟아야겠다고 내심 결심했다.

“술이야말로 백락지장(百樂之長)이라고 했거늘, 오늘따라 술맛이 이렇게도 좋구나! 앞으로 우리 예쁜 딸과 이런 자리를 자주 갖지 못하게 될 거라 그런가?”

성춘의 뒤쪽 벽에 세워진 병풍 속의 산과 해 사이에 있는 소나무 밑의 사슴과 물속 거북은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래도 이제부터는 지아비와 더불어 부부의 정을 실컷 누리게 될 터이니 나는 조금도 서운치가 않구나. 흐음.”

성춘은 그때 이미 많이 취한 상태였다. 이씨 처녀는 아버지 마음 밑바닥까지를 충분히 읽었다. 혹시라도 딸이 자식 딸린 홀아비에게 시집가서 뭐가 잘못되지나 않을까 염려를 떨치지 못하신다는 것을.

그런데 막상 안동 김씨 집안에 들어와 보니, 한참 윗대인 김방경 장군만 훌륭한 게 아니었다. 시아버지도 그렇고, 시동생들도 대단했다. 남편 충갑도 생원과 진사, 문과에 모두 급제할 정도로 학문이 높았지만, 시민의 숙부 4형제인 효갑, 우갑, 제갑, 인갑 등도 대과와 진사에 급제했다.

그리하여 오갑(五甲)이 홍패, 백패로 구첩병풍을 만들었다 하여, 세상에서는 그것을 홍백병(紅白屛)이라고 불렀다. 홍패는 문과의 회시에 급제한 사람에게 내어주는 붉은색 증서를 말하고, 백패는 소과에 급제한 생원이나 진사에게 주던 흰색 증서를 말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멀리 떨어진 경상도 진주 땅의 조운에게 중요한 사람은 김제갑이었다. 그가 바로 훗날 조운 자신과 시민과의 사이에 다리를 놓아준 장본인이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 조운이 운명대로 살아갈 수 있게 할 막대한 역할을 맡은 이가 그였던 것이니, 하늘의 섭리란 실로 오묘한 것이었다.

하지만 시민에게 문제가 생겼다. 어머니와의 갈등이 그것이었다. 이씨 부인은 아들에게 문과시험을 치르도록 권했지만, 호방한 기질을 타고난 시민은 처음부터 문약(文弱)한 선비가 싫었다. 게다가 여기에는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순탄치 못한 인생역정이 한몫을 했다. 두 분 모두 사화(士禍)의 희생물이었다. 시민은 그들보다 먼 선조인 김방경 같은 무장(武將)의 길을 더 원했던 것이다.

“네 맏형을 보아라. 지금 저렇게…….”

이씨 부인 음성은 복잡하고 떨렸다. 전처 광주 김씨 소생인 시회를 입에 올릴 때면 늘 그랬다. 시민 머리에, 선조가 즉위한 그해,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부평부사를 지내고 있는 시회 모습이 떠올랐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그 시회보다도 자기 배로 낳은 시각(時覺) 때문에 더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시민은 알았다. 시민의 친형 시각은 생원까지 올랐으나 후사를 잇지 못하고 일찍 죽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면, 시민은 두 가지 면에서 어머니에게 불효였다. 문과시험을 치르지 않겠다는 것, 아직 혈육이 없다는 것.

모자간 갈등의 폭은 깊었다. 이씨 부인의 실망감, 아니 자식으로부터 맛보는 배신감은 무척 대단하여, 그때부터 시민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시민은 불효자의 죄책감을 떨치고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릴 길은, 김방경 할아버지 같은 뛰어난 장군이 되는 것이라 여기고 더욱 무인에의 길에 매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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