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36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36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1.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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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장. 2. 마귀? 귀인!
맏이인 조운이 당연히 대대로 내려오는 가업을 이어받아 농사를 지어야 했다. 그러나 오직 하늘을 날 수 있는 기구를 만들기 위한 일에만 빠져 있었으므로, 동생들 둘이서만 아버지를 도와 집안의 적지 않은 농토를 일구고 있는 실정이었다.

“아버님을 언제쯤 만나뵐 수 있을까?”

조운이 작은 소리로 물었다. 자신을 친아들처럼 대해주는 사람이었지만, 조운은 언제나 그가 조심스럽고 왠지 손이 아팠다. 그 이면에는 둘님이가 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며칠 있으면 오셔요. 오라버니께 도움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그러나 말은 그렇게 했지만 둘님의 얼굴에는 한동안 조운과 헤어져 있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인지 서운하고 어두운 기색이 가시지 않았다. 조운은 그런 둘님에게서 노처녀의 모습을 발견하고 가슴이 아파왔다. 여느 처녀 총각 같으면 벌써 혼례를 치르고 자식까지 보았을 그들이었다. 무작정 기다리게 하는 그 자신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천하에 못된 놈이란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일이 성공하기 전에는 둘님을 아내로 맞아들일 수 없다는 신념만은 변함이 없었다.

마을 쪽에서 또 한 번 허서방 집의 늙은 닭 울음소리가 게으르게 들려오고 있었다. 이제는 달걀도 낳지 못하는 퇴계로 알려져 있는 암탉이었다. 둘님의 손이 옷고름 없는 저고리 앞섶에서 허둥거렸다. 조운이 일어서다가 비틀했다. 둘님이 부축했다.

“오라버닌 좀 더 쉬고 계세요. 집에 가서 상처에 바를 약 좀 가져올게요.”

그러고 나서 둘님은 조운이 무어라 입을 열기도 전에 몸을 돌려세우고는 급히 걸어가기 시작했다. 조운은 미완성의 비행기구 쪽으로 다가갔다. 실패한 잔해들을 보자 그는 눈에 핏발이 서고 머리털이 곤두섰다. 망가진 대나무며 찢겨진 화선지가 원수같이 여겨졌다. 그의 손에 사라져간 슬픈 새의 시체였다. 태어나지도 못하고 모태 속에서 죽은 생명.

그런데 조운이 막 허리를 굽혀 땅에 뒹굴고 있는 마끈을 주워들려는 그때였다. 대기를 뒤흔드는 비명소리! 조운은 반사적으로 둘님이 간 방향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하늘과 땅이 빙글 자리바꿈을 하면서 심장이 ‘뚝’ 멎어버리는 것 같았다.

둘님의 머리채를 사정없이 낚아채 둘님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치고 있는 여자, 광녀였다! 그 미친 여자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위험천만한 기운이 이만큼 떨어져 있는 조운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했다. 엄청난 질투심과 불같은 분노의 포로가 된 광녀의 발작! 그 섬뜩한 광기! 그 절체절명의 위기!

조운은 장딴지를 다쳐 피를 흘린 사람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바람같이 그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광녀가 더 빨랐다. 광녀는 조운이 달려오는 것을 보자 급히 돌아서서 내닫기 시작했다. 도망치기 전에 땅에 엎어져 있는 둘님에게 탁 침을 뱉기까지 했다.

조운은 넋을 잃고 서서 멀어져가는 광녀의 뒷모습만 바라보았다. 세월이 그 여자를 비껴간 듯 예나 이제나 변함이 없었다. 까치집 같은 머리, 입었다기보다 걸쳤다는 말이 더 어울릴, 원래 흰옷이었음에도 이제는 회색 옷처럼 보이는 때 낀 의복, 한쪽 발끝에만 매달려 딸려가는 검정고무신. 둘님의 울음소리가 남은 한 짝 검정고무신 위에 추락하는 비행기구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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