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특집 > 경남문단, 그 뒤안길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0)<41>경남문단의 세 분 중진 지다(3)
경남일보  |  jung@gnnews.co.kr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승인 2015.07.20  16:33:47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80)
<41>경남문단의 세 분 중진 지다(3) 
 
1월 11일자 일간지들은 김열규 교수의 유고집 ‘아흔 즈음에’ 출간 기사를 앞다투어 쓰고 있다. K신문은 ‘한국학 거장의 노년도 지루함과 고독은 비켜갈 순 없었다’라는 제목으로, D신문은 ‘나무로 살고 싶어한 노학자 나에게 죽음이란..’ 제목으로 쓰고 있는데 김교수의 노년의 삶이 비교적 솔직히 드러나고 있는 책이란 점에 주목했다. 책 내용 중에 김교수의 장녀가 쓴 추모글 내용이 인상적이다.

“내가 웃은 다른 이유는 물뱀, 족제비, 복어는 있지만 나를 포함한 아버지의 자식들, 삶의 마지막에 그토록 헌신하셨던 엄마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고향 포구나무로 시작해 당신의 어머니가 넘던 고개 동산재로 돌아온 자신의 이야기로 끝난다.” 장녀 김소영(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그럼에도 아버지의 이러한 독존과 기개가 좋고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필자가 뒤에 고성 하일면으로 문상을 갔을 때 부인 정상옥 작가는 김교수는 자식들 자랑을 할 법했지만 평생을 하지 않아 섭섭했다고 말하면서도 그것이 김교수의 자식 교육의 방법이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고 했다. 그런데 김교수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아내의 시, 수필 등에 대해 각별히 코멘트 해주고 액자를 만들어 서재 공간에 걸어주기도 하더라는 것이다.

아직 필자가 ‘아흔 즈음에’를 입수하지 못해 책에 흐르는 흐름을 잡지 못하지만 그 속에 ‘여생(餘生)’이라는 말이 나오는 모양이다. 나머지, 별의미 없는 것이라는 뜻으로 쓰이는 것이 싫다는 것이고 노인 연대가 그것대로의 절대적 가치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을 듯 싶다. 김교수는 생전에 ‘노인의 삶’이라는 책을 낸 바 있다. 그 속에 그 가치로움이 생생히 드러나 있다.

김교수의 만년 저서 중에 ‘독서-김열규 교수의 열정적 책읽기’가 있다. 이 책은 김교수의 독서를 통한 자서전이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자서전은 연대기라든지 일상적 삶의 애환이라든지 가정, 사회, 국가 등에 대한 자신의 대응 기록일 터이다. 그러나 ‘독서’는 그런 기록일지라도 독서에 얽힌 이야기로 풀어간다. 순서는 유년시절(내 생의 첫 고전 듣기), 아이시절(낭독의 즐거움), 소년시절(몰입의 유혹), 청년시절(책읽기의 미학), 노년시절(농익은 책 읽기), 요령읽기(행복한 지적 놀이, 독서), 의미 읽기(카타르시스의 발견), 장르읽기(골라 읽는 책의 유혹), 작품읽기(내 것이 되어버린 책들) 순으로 편집돼 있다.

김교수는 이 책의 프로로그에서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인생에는 자동차 옆에 붙여 놓는 네비게이터 따위는 없다.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그런 게 만에 하나라도 있다면 우리는 멍청이가 되고 말 것이다. 뻔한 길! 횅하고 가면 그뿐인 길! 그래서 묻고 찾고 헤매고 할 게 아주 없는 길, 그런 길이라면 누구나 두 번 다시 안가려고 들 것이다. 그러기에 길은 헤맴이다. 방황이다. 방랑이다.” 김교수는 왜 인생이 방황인 것에다 방점을 두는 것일까?

김교수가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의 케임부리지에 머물 때 이웃 뉴햄프셔주에 있는 프로스트의 집이며 근처의 전원지대를 헤맨 것은 혹시나 바로 그 두 갈래 길을 찾을 수 있을까 해서였다. 아무도 밟지 않은 길, 그건 모르는 길이고 새 길이다. 몰라야 새 길이 된다. 김교수는 왜 인생에 있어서 ‘새 길’ ‘밟지 않은 길’을 원하는 것일까? 김교수의 바둑판이 보이기 시작한다. 그런 길은 책 읽기에서 말미를 얻게 된다는 것, 책은 미지의 갈래길의 나침반이 된다는 것이다. “숲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라 회고할 수 있는 삶을 그는 열망한 것이다.

김열규의 읽기의 첫 스승은 할머니였다. 밤마다 그는 할머니 옆에 누워 “할무이 이바구” 하면 “아이가 이놈아 또 이바구가” 그렇게 하여 듣기를 겸한 읽기의 교실은 열렸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시작되었다.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 옛날 옛날 그 옛날에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에........” 이 ‘이바구 떼바구 강떼바구’를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냥 소리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김열규 어린이! 그때 어린이는 ‘소리만의 詩學’을 만났던 것이다.
경남일보의 다른기사 보기  
폰트키우기 폰트줄이기 프린트하기 메일보내기 신고하기
트위터 페이스북 네이버 구글 msn 뒤로가기 위로가기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
자동등록방지용 코드를 입력하세요!   
확인
- 200자까지 쓰실 수 있습니다. (현재 0 byte / 최대 400byte)
- 욕설등 인신공격성 글은 삭제 합니다. [운영원칙]
이 기사에 대한 댓글 이야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