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50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50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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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1. 검은 대나무 거리에서
“저만큼 물러들 가 있거라. 저 사람과 둘이서만 얘기를 나누고 싶다.”

수행원들이 하나같이 펄쩍 뛰었다. 자존심 상하는 소리도 해댔다.

“아니 되옵니다, 목사 영감! 저놈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위험하옵니다. 무슨 짓을 할지 모르니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저런 초라한 놈하고 독대를 하시겠다니요?”

김제갑 목사는 댓잎에 가는 빗방울 듣는 소리처럼 조용히 웃으며,

“괜찮아. 본관이 보아하니 저 사람은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야. 저 자의 눈빛을 보거라. 아주 선량하고 참해 보이지를 않느냐? 눈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느니. 게다가 나는 이 고을을 다스리는 목민관이거늘, 그 신분과는 상관없이 어느 누구라도 만나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또 무슨 애로 사항이나 건의 사항이 있으면 받아들여 바로 잡아야 할 책무가 있도다. 그러니 모두들 내 말대로 하라!”

목사가 그렇게까지 나오니 수행원들도 더는 어쩔 수가 없음을 깨달은 듯했다. 그들은 조운을 힐끔힐끔 보면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혹시 몸에 무슨 흉기라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우려하는 기색도 엿보였다. 평민 복장이면서도 목사 앞에서 굽힘이 없는 사내가 아무래도 위험한 인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김제갑 목사가 가마에서 내려왔다. 소가죽으로 만든 갖신이 조운의 바로 코앞에 보였다. 목사는 가마꾼들도 저쪽으로 보냈다. 이제 그곳에는 두 사람만 남았다. 다른 이들은 좀 멀찍이 떨어져 서서 유심히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만 일어서도록 하라. 다리가 많이 저릴 것이다.”

김제갑 목사는 그때까지 땅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조운에게 친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조운이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발에 신겨져 있는 볏짚으로 삼은 짚신에 마른 댓잎이 붙어 있었다. 순간적이지만 조운의 머릿속에 지난날 상돌의 까만 목에서 보았던 노란 댓잎이 떠올랐다. 신분을 상징하는 무슨 표적과도 같았었다.

그러자 또 동시에 나타나 보이는 사람이 저 광녀였다. 제멋대로 걷어 올린 검정치마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허벅지는 죽순같이 희고 곧아 보였다. 깨끗한 하얀색이 그렇게 슬퍼 보인다는 사실을 그는 믿을 수가 없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에 연줄이 끊어져 연을 날려 보낸 기억 탓인지도 모른다. 뽀얀 젖가슴은 더 그랬다. 조운이 진정 두렵고 무서운 것은 그 젖가슴이 보이는 꿈이었다.

꿈속에서 광녀는 전혀 미친 여자가 아니었다. 아니,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말이지만 꿈에는 광녀가 둘님으로 변해 있었다. 어쩌면 둘님이 광녀로 바뀌어 있는지도 몰랐다. 윤기 흐르는 단정한 둘님의 까만 머릿결과 까치집 같은 광녀의 머리카락이 하나로 뒤엉켰다. 아무리 꿈이지만 둘이 같은 한 여자였던 것이다.

그는 부끄럽게도 여자 젖무덤에 고개를 처박고 있었다. 그러다가 여자의 웃음소리인지 울음소리인지 모를 무슨 묘한 소리를 듣고 얼핏 보니, 얼굴은 분명히 둘님인데 젖가슴은 광녀의 그것이었다. 느낌이 그랬다. 모든 것은 오직 느낌으로만 알 수 있었다. 아, 이게 꿈이구나!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거야! 그런 느낌도 현실에서처럼 생생했다. 하지만 그런 속에서도 꿈은 계속되는 것이었다. 하나가 된 두 여자와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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