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58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58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2.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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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3. 소문에는 있다
둘님의 아버지 학노가 돌아왔다.

그는 적게는 수 일, 많게는 수 개월을 떠돌다가 귀가하곤 했다. 또한 그럴 때마다 그는 일가친척들이나 이웃사람들에게 줄 선물꾸러미를 손에 들고 있었다.

“그동안 잘 지내셨는가? 양친께서도 무고하시고?”

인사차 집으로 찾아온 조운에게 학노가 말했다. 그는 오래 전부터 마음속으로 조운을 사윗감으로 점찍어두고 있었기에, 노독에 약간 피로해 보이면서도 아주 정감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이번에 늦게 돌아온 것은 보부상 중 한 사람이 사고를 당한 때문이라 했다.

“고생이 많으셨지요? 그래도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조운도 미래의 장인이 될 사람에게 깍듯이 대했다. 하지만 옆에서 묵묵히 그들 대화를 듣고 있는 둘님을 훔쳐보는 그의 심사가 더없이 어지러웠다. 앞날은 누구도 알 수 없는 법이라지만, 살아가면서 자신과 둘님과의 사이에 이런 일이 있으리라고는 정말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오랫동안 얼굴을 대해왔지만 그녀가 너무나 낯설고 서먹하기까지 했다.

그랬다. 조운은 둘님, 아니 여자의 변신 앞에서 정신없이 허둥거려야 했다. 옆에 다른 사람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렇게 다른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무엇보다 둘님은 절대 그런 여자가 아니었었다. 언제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서 있는 동네 어귀 정자나무처럼 한결같았었다. 그런데 하루 열두 번도 더 바뀌는 여자로 변해버렸다.

그들 둘만 있을 때, 둘님은 석녀였다.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자라는 뜻인 그런 석녀가 아니라, 말 그대로 돌여자, 돌 같은 여자였다. 피가 흐르지 않고 아무런 감정도 없는, 말도 행동도 하지 않는 돌의 여자. 그러자 조운 자신도 돌이 돼버리는 듯했다. 그들은 산골짜기나 강가에 의미 없이 제멋대로 나뒹굴고 있는 두 개의 돌멩이에 지나지 않았다. 돌 같은 침묵으로만 일관하는 둘님 앞에서 조운은 숨이 막혀 죽어버릴 것만 같았다.

그들 옆에 다른 누군가가 있을 때, 둘님은 광녀였다. 미친 여자라는 뜻인 그런 광녀가 아니라, 조신(操身)한 여느 여염집 처녀들과는 다른, 어디 시끄러운 광대패가 들어왔나 여겨질 정도로 너무나 수다스러운 여자였다. 게다가 이 세상에서 가장 조운을 사랑하는 연인같이 행세했다. 조운을 향해 잠시도 쉴 새 없이 말을 해대었다. 그런 광기(?)로만 일관하는 둘님 앞에서 조운은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조운은 그런 둘님의 어깨 너머로 보아야 했다, 연 하나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 광녀를. 둘님의 등에 대고 ‘후후’ 하고 입으로 끝없이 광기를 불어넣고 있는 진짜 미친 여자를. 그러면서 조운 자신에게 말했다. 나 연 한 개 더 만들어 줘. 히히히. 그러다 어느 순간, 광녀가 홀연 연기로 변하더니 둘님의 몸속으로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는 마침내 둘님의 젖가슴이 되는 것이었다.

조운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마구 뒤흔들었다. 그때였다. 둘님의 새로운 변신이 시작된 것은. 그녀는 누구보다 연인을 걱정하고 위해주는 여자의 얼굴이 되어 학노에게 말했다.

“아버지, 조운 오라버니 일, 제가 부탁 드렸던 사람…….”

조운은 소름기가 쫙 돋쳤다. 자신과 단 둘만 있을 때 보았던 둘님은 어디에도 없었고,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은 저 광녀였던 것이다. 아버지, 나 연 한 개, 히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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