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초의 언론제국을 건설한 로이터
로이터는 1848년에 프랑스로 가서 통신사 경영에 대해 배운 뒤, 1849년에 독일의 아헨에 전보 통신사를 세웠으며, 1851년 영국에 귀화하여 런던에 ‘로이터 통신사’의 전신인 ‘서브마린 텔레그래프’를 창립하였다. 그는 정확하고 신속한 뉴스의 수집과 배급으로 신뢰를 쌓아나갔다. 처음에는 개인의 사업상 전보만을 취급하다가 1858년에 일반 신문에 쓰이는 뉴스를 취급하며, 전 세계로 통신망을 펴나갔다. 1865년 북해와 독일·프랑스·미국 간의 케이블 건설을 허가받았다. 1851년에는 영불해협에 있는 해저 케이블을 사용해서 파리의 주식시장 정보, 런던의 금융정보를 각지에 송신했다. 1870년에는 당시 유럽의 통신사인 아바스(프랑스), 볼프(독일)와 시장 분할 협정을 맺고, 미국을 제외한 세계 뉴스를 3사가 독점했다. 이 ‘대동맹’은 후일 AP 등에 의해 깨질 때까지 로이터의 세계 지배의 기반이 됐다.
로이터는 통신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일등이 되어라. 그러나 정확한 것을 알리는 일등이 되어라.”를 모토로 삼았다. 1865년 4월 15일에 공식적인 확인이 발표되기 두 시간 전에 이미 미국 대통령 링컨이 암살되었다는 소식을 보도해 세상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 후, 민영화 후에는 1956년 소련공산당 비밀 전당 대회에서 행해진 니키타 후루쇼프 수상의 스탈린 비판을 특종으로 보도하는 등 보도기관으로서의 실적을 쌓아갔다. 로이터(Reuters) 통신사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국의 AP, 프랑스의 AFP, 그리고 UPI(국제합동통신)와 함께 부동의 세계 4대 통신사 가운데 하나로 군림하고 있다. 현재 로이터 통신사는 150개국 230개 도시에 지국이 있고, 19개 언어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현재 주요 매스컴은 로이터와 계약을 맺고 있다.
로이터는 성공하려는 의지에 집착할 뿐만 아니라,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이 사업 성공의 열쇠였던 것이다. 같은 유태계로서 독일 태생이었던 칼 마르크스가 문법적으로 문맹이라고 업신여기까지 했던 무명의 독일계 이민자는 10년 만에 로이터 통신사를 영국의 성공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켜놓았다. 그래서 로이터가 갈망했던 사회적 인정도 그의 성공과 함께 부여받게 된다. 마침내 1871년 로이터는 엄청난 액수의 돈을 지불하고 빅토리아 여왕으로부터 작센코부르크 고타의 로이터 남작이라는 작위를 수여받게 된 것이다. 로이터의 성공비결은 남보다 빠르다는 것이었고, 항상 최초가 되려고 했던 그의 의지와 열정에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세계 최초의 언론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언론기업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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