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65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65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2.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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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1.어떤 해후
“내가 따라가면 안 될까?”

“뭐라고?”

“문제는, 우리 같은 사람은 마음대로 다닐 수 없다는 것인데…….”

상돌이 자신보다 더 어른스럽다는 생각을 조운은 했다. 늘 천대 받으며 다른 계층의 눈치를 살피며 살아야할 운명이기에 그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건 좋은 쪽으로의 성장이 아니었다. 응달에 자라는 고사리나 맥문동 같은 음지식물이었다.

김제갑 목사가 말한 잣나무가 생각났다. 장차 위기에 빠진 조선을 구할 시민은, 그의 고향에 많다는 잣나무를 닮았을 것 같았다. 늘 푸르고 좋은 향기를 가진 키 큰 나무처럼 빼어난 기상과 포부를 지닌 귀인일 듯했다. 김 목사의 짧은 몇 마디 말을 통해서도 그가 범상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만했다.

그러자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시민의 모습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언제나 그랬듯, 조운의 마음은 또다시 초조하고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새처럼 날아서 그의 생명을 구해야할 운명을 타고 태어났다는데, 아직도 자신이 이뤄놓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산산이 부서진 꿈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은 비행기구의 잔해들-망가진 대나무 몸통, 찢겨진 무명천 날개, 빠져나간 소나무 바퀴, 너덜거리는 잡동사니 머리-은 악몽의 조립품들과도 같았다. 그리고 눈을 뜨면 또 아귀같이 덤벼드는 것은, 자칫 둘님과의 정분을 파탄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는 광녀와의 어처구니없는 헛소문, 그 미친 돌개바람과도 같은 추문이었다.

조운은 상돌에게 자초지종을 털어놓고 만약 너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었다. 차라리 백정들 거주지인 너의 동네로 가서 꼭꼭 숨어버리고 싶다고, 운명이 더 이상 나를 따라오지 못할 곳으로 도망쳐버리고 싶다고, 저 ‘나는 수레’를 생각하지 않아도 될 그런 곳이면 어디든 좋다고, 그를 붙들고 엉엉 소리 내어 울고 싶었다. 그만큼 조운은 외롭고 힘들었다. 게다가 그에게는 둘님의 빈 자리가 너무나도 크고 넓었다. 돌아서는 듯하다가 다시 다가서고, 다가서는 듯하다가 다시 돌아서는 들님의 진심은 무엇일까? 상돌이라면 그 질문에 답해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도 조운이 너 같은 평민인 것처럼 가장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 기발한 생각이라니? 옷차림과 머리 모양을 적당히 바꾸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 같았다. 무엇보다 동행이 있다면 정말 큰 힘이 될 것이었다.

“정말 같이 가주겠니?”

“나라에서 정해준 좁은 구역에서만 살다 보니 갑갑해서 죽겠어. 벌써부터 더 넒은 세상 구경을 하고 싶었어. 정말 신기하고 놀랄 일도 많을 거야.”

상돌은 꿈꾸는 얼굴이었다. 백정의 설움과 분노는 찾을 수 없었다.

“위험하지는 않을까?”

상돌이 웃었다. 그 웃음이 조운의 눈에는 여간해선 풀 수 없는 수수께끼같이 복잡해 보였다.

“지금까지 짐승 취급을 받으면서 살아왔어. 백정은 사람보다 소에 더 가깝지. 나도 사람보다 소가 더 좋아. 그런 소를 죽여야 살아갈 수 있는 내 운명이 너무나 싫고 화나지만 어쩌겠어? 여하튼 그보다 더 위험한 고비도 여러 번 넘긴 나야.”

조운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상돌의 말끝에는 수천 개의 비수와도 같은 위험한 기운이 꽂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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