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73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73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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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3. 비차, 나는 수레
그러나 귀머거리 삼년, 장님 삼년이라더니, 윤달규가 딱 그랬다. 그는 여자처럼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장죽걸이만 매만질 뿐 말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긴 담뱃대를 기대어 세우는 장죽걸이에 짧은 담뱃대를 걸쳐 세우려 한 조운의 행동이, 얼마나 긴박한 상황 속에서 나왔으며 또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마침내 두 사람은 포기했다. 돌아가는 길에 너무나 큰 실망과 좌절감에 빠진 나머지 정말 미쳐버리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는 한이 있다손 치더라도 일단은 자리를 털고 일어서야 했다. 그런 가운데 조운은 자꾸만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이런 말을 겨우 삼켰다. 나 비행기구 한 개 더 만들어 줘. 히히히.

그런데 그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윤달규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 힘없이 댓돌 아래로 막 내려섰을 때였다. 문득 그가 눈은 방치레로 깔아둔 보료에 둔 채 말해왔다.

“내 한 가지만 말해주리다. 돌아가거든 비차(飛車)의 배를 두드리시오. 그리하면 바람이 일어나서 띄워 올릴 수가 있을 것이오.”

두 사람은 벼락 맞은 고목처럼 움찔했다. 조운이 숨 가쁘게 물었다.

“비차, 비차라고 하셨습니까?”

상돌도 급히 물었다.

“배를 두드리면 바람이 일어나서 띄워 올릴 수가 있다고요?”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윤달규는 다시는 입을 열지 않았다. 뿐만이 아니라 사람이 방 밖에 서 있는데도 사랑방 문을 탁 닫아버렸다. 그리고 그때부터 안에서는 작은 기침소리 하나도 새나오지 않았다. 어쩌면 잔정은 없어도 큰 정은 있는 사람인지 몰랐다.

두 사람은 잠시 그대로 서 있다가 그집을 나왔다. 저 아래 평지에서 불어 올라오는 바람이 그들의 옷자락을 나부끼게 했다. 그들 몸을 하늘로 띄워 올릴 것처럼.

“비차, 비차, 비차…….”

아름드리 팽나무가 그 마을 수호신이나 파수꾼같이 서 있는 동구를 빠져나올 때까지 조운은 계속해서 그 소리만 되뇌었다. 비차, 비차, 비차…….

“배를 두드리면, 배를 두드리면…….”

상돌은 상돌대로 그 말만 되풀이했다. 배를 두드리면, 배를 두드리면…….

조운은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같이 마구 찢겨진 연의 구멍 사이로 가느다란 연실 낱 같은 희망 하나가 보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아직은 팔을 뻗어 잡으려고 해도 손가락 사이로 연기나 안개처럼 빠져 나가버릴 것만 같은 희망이었다. 광녀에게 긴 머리채를 낚아 채여 땅바닥에 패대기쳐지던 둘님의 속절없는 모습과도 흡사한.

“비차가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는가, 아우?”

이윽고 키 낮은 풀들이 힘없는 민초들같이 붙어 자라는 작은 언덕 밑을 지날 때 조운이 물었다. 상돌 얼굴이 꽈리처럼 빨개졌다. 저 무시무시한 산적 두목 앞에서도 대범했던 그였다. 조운은 속으로 아차! 했다. 태어나서 책이라고는 냄새도 맡아보지 못한 그일진대, 의형제로 지내다 보니 백정이란 것을 잊었고, 그런 면에서는 광녀와 차이가 없었다.

조운 스스로도 똑같았다. 악몽에 시달릴 땐 더더욱 그랬다. 일자 무식쟁이 상돌이나 정신이상자 광녀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둘님의 얼굴과 광녀의 젖가슴. 그의 꿈속 여자는 언제나 그런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부끄럽고 참담한 몽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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