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 평에 심은 꿈(은퇴 설계서)
천 평에 심은 꿈(은퇴 설계서)
  • 경남일보
  • 승인 2014.03.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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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삼희 (시인)
오래전 지리산 아미랑 고개에 있는 천 평 밭을 하나 시댁에서 주었습니다. 그 밭에 첫 딸이 태어나던 해 기념으로 대봉 감나무를 심었지요. 딸 이름을 따서 가람농장이라 지었습니다. 남들은 봄 꽃놀이를 가면 우리 가족들은 대봉농장으로 가서 감나무 아래 상추와 쑥갓 등 유기농 채소를 심었습니다. 가을이 오면 단풍구경 한번 제대로 못가고 감을 수확하지요. 둘 다 직장인으로 주말을 이용해서 일을 하였습니다. 유수처럼 세월이 흘러 감나무와 딸은 벌써 23살 동갑내기입니다.

어느 날 남편은 대봉감으로는 별 소득도 안 되니 이제 언제 명퇴를 당할지 모를 직장에 대비해야 된다면서 지리산 명품 곶감을 만들어야 한다고 불쑥 제안을 했습니다. 농장 이름도 아미랑 농장으로 바꾸면서 저를 주눅 들게 하더니 결국 4년 전 산청 곶감에 도전하였습니다. 곶감을 깎아 보니 생각보다 소득도 없고 마음과 육체는 고생뿐이었습니다.

처음 곶감을 깎은 해는 날씨가 너무 덥고 비가 많이 왔습니다. 일주일에 3일은 비가 내려 곶감에 곰팡이가 피기 시작하였고, 가을 내내 가을비를 뿌리고 있었습니다. 그토록 희망을 품은 우리에게 비웃기라도 하듯 결국 하나도 못 팔고 땅속에 묻고 말았습니다. 일 년 고생과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 버리고 내년을 한 번 더 기대해 보자고 서로 위로를 했습니다.

작년에도 작황은 좋지 않았지만 그래도 곶감 값이 좋아 설 선물로 잘 유통이 되었습니다. 지인들은 모두가 노후대책을 벌써부터 잘 세워 부럽다고 하지만 눈물 겨운 실패 뒤에 오는 좌절감은 농사를 지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입니다. 노후대책이라 하면 그래도 좀 더 큰돈이 되어 기쁨 두 배, 소득 두 배가 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천 평에 꿈을 심고 작은 것에 만족을 하며 살기로 했습니다. 작년에는 다행히 농장에 조립식 이층을 소박하게 올렸습니다. 귀농 아닌 주말을 이용해 출퇴근하는 투잡 농부인 셈이지요.

뒤돌아보면 제 인생에 있어 작은 텃밭 하나가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고 살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소일거리로 땀 흘려 노력해서 얻은 농사의 보람도 생각하기 나름입니다. 사는 거 별거 있나요. 건강만 따라 준다면 풀 꽃 하나에도 감사할 줄 아는 배려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면서 삶을 사는 거지요.

멀리 지리산에 앉은 설경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풍년이 되어 이 작은 간절함을 버리지 않기를. 먼 후일 지금처럼 흙냄새 맡으며 살 수 있기를 기도해 봅니다. 노후에 일거리를 선물해 주신 선견지명이 있으신 시부모님께 감사하다고. 농장 가는 길에 시아버님·시어머님 산소에 가서 소주 한 잔 올리며 큰절 올려야 할 것 같습니다.
정삼희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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