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79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79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3.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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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1. 칼물고 널뛰기
“미친년!”

조운은 광녀의 젖가슴에 가래침을 내뱉듯, 증오의 피로써 절규하듯 한 번 더 소리쳤다. 그건 어쩌면 그 자신더러 ‘미친놈!’ 하고 말한 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러고는 엄청난 적대감과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광녀를 노려보았다. 그 차마 믿기 어려운 슬프고도 섬뜩한 환영이 나타난 것은 다음 순간이었다.

온 세상이 구멍 송송 뚫리고 갈기갈기 찢겨져 나간 거대한 하나의 비차로 변하고, 그 시커먼 구멍과 갈라진 틈 사이로 고통스럽게 죽어가고 있는 그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둘님도 보였는데,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그를 매몰차게 뿌리치고 돌아서는 게 아닌가? 그런데 곧 나타난 광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를 붙들고 어떻게든 살리기 위해 안간힘을 다하며 서럽고 안타깝게 울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저런 일이?

조운은 경황없는 가운데서도 어렴풋 그 이유를 짚어내었다. 광녀가 그의 생명을 구해준 은인이라는 자각이 은연중 그런 식으로 변모되어 나타나 보였다는 것을. 둘님은 너무나 변해버렸다는 자기인식이 둘님을 그런 가공할 모습으로 재생해 냈다는 사실까지도.

조운은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런 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자기 목숨을 건져준 광녀보다도 냉정하게 돌아서는 둘님을 위해 또다시 소리 질렀다. 미친년! 그러자 그 소리는 이런 소리로 바뀌어 돌아왔다. 미친놈!

그게 언제부터였을까? 광녀가 울고 있다. 운다. 웃는 게 아니고 운다. 흑흑흑. 조운은 머리털이 몽땅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잠시 가신 듯하던 술기운이 한꺼번에 치밀었다. 복병의 공격을 받는 느낌이었다. 웃는 광녀보다 우는 광녀가 더 무서웠다. 그 고을 공동묘지가 있는 저 말티고개 너머 선학산 원귀가 그녀 몸을 점령했는가?

‘아, 이럴 때 비차가 있었으면!’

조운은 동네 저 뒤편 비차 작업장이 있는 분지 쪽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상돌과 함께 찾아갔던 충청도 노성 땅의 윤달규가 떠올랐다. 정말 그는 비차를 만들었을까? 어쨌든 비차가 있으면 그것을 타고 하늘로 도망갈 수도 있을 것이었다. 둘님을 비차에 태워주면 모든 오해를 풀고 종달새 같은 예전의 그녀로 돌아올 것 같았다.

비봉산 능선을 타고 내려 가마못 얼음판 위로 미끄러지듯 달려오는 찬바람이 조선을 노린다는 외적이 내지르는 함성같이 들렸다. 조운은 단지 추위 때문에서만은 아닌 강한 오싹함을 느꼈다. 울음을 그친 광녀가 그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던 것이다. 순간, 광녀의 몸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질기고 강한 거미줄이 나와 그를 친친 감아버리는 듯했다. 오랫동안 바깥 한기에 노출돼 있어 몸에 마비증상이 나타나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다시 들려온 광녀 말은 그의 신경이나 근육뿐만 아니라 정신까지 마비시켜버리는 듯했다.

“나, 그 여자 죽여 버릴 거야.”

그러면서 어금니를 깨물었다가 혓바닥을 쏙 내밀어 보이는 광녀의 두 눈은 어둠 속에서 봐도 벌겋다. 조운은 전율했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는 벅수도 알 일이었다. 그 말을 들은 조운 자신이 벅수, 바보같이 보였다. 아니, 지금 광녀 모습이야말로 영락없는 벅수였다. 그녀가 할매벅수라면 조운 자신은 할배벅수였다. 충청도로 가는 길에 들렀던 어느 마을 입구에 마주보고 서 있던 한 쌍의 돌장승. 둘님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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