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91)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91)
  • 경남일보
  • 승인 2014.03.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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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4)
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291)
<52>경남문단의 중진 세 분 지다(14)  
 
세 분 중진 중에 제일 나중에 돌아간 분은 조종만(1932-2013) 시조시인이다. 빈소는 인천 인하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이었고 발인은 2013년 12월 26일(목)이었다. 장지는 조시인의 고향인 의령군 화정면 상정리 들머리 선영이었고 당일 오전 10시경 인천에서 오는 유족들의 장례차량이 도착되는 시간, 장례의식이 시작되었다.

필자는 장지로 바로 가서 영결식 예를 표했다. 날씨가 좋았고 장지를 확실히 몰라 30리를 통과하고 난 뒤에 다시 되돌아오는 시행착오를 거쳤다. 우리 일행은 진주문인협회 주강홍 회장의 승용차를 이용했는데 차에는 주회장 외에 신일수 진주문협 전회장, 홍종기 시인 그리고 필자가 동승했다. 비봉산 서쪽 새로 개설된 못재터널을 지나 단목을 지나 대곡 삼거리에서 화정면 방향으로 우회전해 가는데, 모처럼 고인이 살아 있는 사람들끼리 같은 목표로 동승하여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준 것이었다.

일행들은 우선 화정면에 사는 창녕조씨 일가에 대해 화제를 삼았다. 조종만 시인 교장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자기 집안 인사로서 부산지방의 시인인 조순에 대해 떠올렸는데 그 시인 이야기를 필두로 그 시인의 아내는 부산대학교 김정자(통영출신, 경남여고, 서울사대 졸업) 명예교수라는 것을 주목했다.그리고 조만옥 장학사와 조만후 의원 형제는 고인과는 종형제라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필자는 지금까지 거론한 인물들과는 다 일정한 인연을 가지고 있음을 밝혔다. 조순 시인의 경우 1965,6년경 서울대 교수회관에서 김정자 교수와 결혼할 때 서정주 선생께서 필자를 보고 “강군도 같이 가세. 조순 시인의 결혼식인데 내가 주례야, 이런 때 인사해 두는 것도 좋아.”그렇게 해서 따라가 풀코스 음식을 들면서 예식 진행을 구경했더니라고 이야기했다. 조만옥 장학사의 경우는 필자와 한때 고교 교사시절 동직에 있었고, 조만후의원의 부인은 필자의 제자였더니라고 말했다.

이어서 신일수 교장은 “조종만 시인 교장과의 인연은 40여년 전 경남수필문학회 창립회원으로 활동하면서였지요. 같은 교직에 몸 담아 있는 데다 문학과 자연, 수석을 채집하는 일이며 화훼 가꾸는 일이며 성정도 거의 비슷해서 자연 친숙해질 수밖에 없었어요.저보다는 5살 연상이라 평소 친형처럼 따르며 때론 어리광도 부리기도 하고 고집스럽게 제 주장을 내세우기도 했지만 교장선생께서는 언제나 넉넉한 웃음으로 받아들여 주었지요. 어느날 인천으로 가서 아들네와 합치고 난 뒤 연락이 왔었는데 너무 섭섭했어요. 이 점에 있어서는 제 생각과 교장선생 생각과는 서로 달랐어요.” 신일수 작가의 말은 그 이후의 얽힌 에피소드로 이어져 시간이 짧고, 진지하고, 뭉클한 이야기로 그칠 줄 몰랐다.

어느새 화정면 들머리 상정(전지니) 강가에 친 장례 천막에 닿았다. 조교장 고인의 부인과 상주들을 차례로 인사하고 그중에 우리집 내자의 제자인 한 따님과는 짧게 그간의 사정을 주고 받았다. 그 사이 진주와 창원에서 다소 문인들이 당도했다. 진주에서 정현대(전 진문협 회장), 강경주(시조시인, 인근 초등 교장)의 얼굴이 보였고 창원에서 김복근(직전 경남문인협회장, 전 거제교육장), 하순희(경남시조시인협회장), 홍진기, 이처기, 강호인 등의 시조시인들의 얼굴이 보였다. 장지가 경관이 수려하다는 것, 고인의 덕이 산천에까지 스민다는 것, 건너편이 지수면이라는 것 등을 화제로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문인들은 장례를 통해 인간에 대한 것, 생애에 대한 것, 사후에 관한 것 등을 가슴 깊이 새기며 사색의 하루를 보낼 것이었다.

조종만 시인은 1932년 8월 13일 의령군 화정면에서 부 조성현, 모 정우분의 팔남매 중 넷째로 출생했는데 자는 만경(萬景), 필명은 조영(曺影)이었다. 1955년 부산사범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사범학교 의무 근무연한 제약으로 휴학했다. 그는 1957년 진주 금성초등학교에 첫발령을 받았고 이어 도동초등학교로 옮기고 59년엔 사직하고 대학에 복학하여 1961년에 졸업했다. 밀양중학교에 발령을 받았고 1968년이후 1980년까지 주로 삼천포에서 교직생활을 했고 1979년엔 삼천포여중 교감이 되었다. 1981년에 산청교육청 중등계장, 1987년 이후 욕지중, 신등고등학교,삼천포중앙여고 등의 교장으로 전전했고 1997년 진주남중학교 교장을 끝으로 정년의 영광을 누렸다. 문단 이력을 뺀다면 그는 모범적이고 충직한 대한민국의 교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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