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97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97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4.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7장. 2. 오직 한번 죽는다
아들 흔이가 말했다.

“사태가 급박하다고 하시는데, 어찌 차마 떠날 수가 있겠습니까?”

아버지 정발이 말했다.

“아비와 자식이 함께 죽으면 무슨 득이 있겠느냐? 그러니 너는 더 고집피우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서 할머니와 어머니를 모시도록 하라.”

“아버지와 여기 같이 남아 있도록 해주십시오. 부탁입니다.”

흔이 울면서 청했지만, 정발은 종자(從者)를 꾸짖었다.

“어서 내 아들을 붙들고 나가서 말에 태워 데려가지 못하겠느냐?”

흔은 끌려가다시피 하면서도 어떤 예감을 느꼈는지 돌아보며,

“아버지! 이게 우리 부자간의 마지막이 아니겠지요?”

그에 대한 답은 말이 대신 해주었다. 히히힝! 그로부터 열하루가 지나 왜적이 부산진에 들이닥쳤다.

‘내 아들아! 가거라. 너로 인하여 우리 집안 대(代)가 끊어지지 않게 되었으니, 이제 나는 편히 눈을 감을 수 있을 것이다.’

정발은 생전에 아들 흔을 살리기 위해 돌려보냈던 그때처럼, 사후에도 또 한 번 다시 돌려보내고 나서 영원히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정발의 시신이 안치된 곳으로부터 애끊는 여자 울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정발의 첩 애향이 한 자루 칼을 앞에 놓고 피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이다. 칼날에서 뿜어져 나오는 시퍼런 빛이 정발의 몸 주변을 감싸주고 있는 듯했다.

“왜놈들에게 몸을 더럽히느니 깨끗한 몸으로 저승으로 떠날 것이다.”

마음은 더 깨끗한, 열여덟 살 열녀가 울다가 웃었다. 광녀는 아닌데도.

“장군! 잘하셨습니다. 역시 장군다우십니다. 참으로 자랑스럽습니다.”

그녀는 붉은 입술을 깨물며 살아 있는 연인에게 하는 것처럼,

“장군! 우리 이승에서 못다 나눈 정, 그곳에서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절대 외롭거나 억울하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여인네의 백옥 같은 몸에서 백일홍 빛깔의 피가 솟구쳐 천장을 물들였다. 한 송이 꽃 같은 주검이었다. 아니, 아름다운 혼이 순간을 넘어 영원한 꽃으로 환생하는 자리였다.

비슷한 시각, 밖에서는 또 다른 피 맺힌 절규가 있었다. 그것은 정발의 노복(奴僕) 용월(龍月)이 내지르는 소리였다.

“이놈들아! 살려두지 않을 테다. 내가 갈 때까지 기다려라!”

충복으로 살아온 용월은 주인의 전사 소식에 눈이 뒤집혔다. 소같이 우직하고 착하기만 한 그는, 두 손에 칼과 창을 하나씩 들고 왜군들이 있는 곳으로 내달렸다.

“어? 저거 미친놈 아냐?”

“미쳤든 안 미쳤든 잘됐잖아? 수급을 하나 더 얻을 수 있으니.”

어떻든 조선군 목을 하나라도 더 베기에만 혈안이 돼 있는 왜군들이었다. 저 검은색 전포만 보면 낯빛이 사색으로 변하던 그자들은, 그때까지 당한 빚을 갚겠다고 나이 든 노복 하나를 향해 들개 떼처럼 우르르 달려들었다.

입에서 왈칵 시뻘건 피를 토하며 용월은 쓰러졌다. 향년 49세였다. 그 또한 죽어서도 외롭거나 억울하지 않을 것이다. 주인과 그의 애첩이 우리와 함께 가자고 그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으니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