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길 교수의 경제이야기
김흥길 교수의 경제이야기
  • 경남일보
  • 승인 2014.04.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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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적 천재성을 입증한 로스 페로

로스 페로.

 
 
“페로는 사업가적 통찰력, 기업가 자질, 과시벽, 구식 애국주의에 정력 넘치는 남부 카우보이 기질을 갖춘 창조적 천재이다.” 경제 경영 전문지 포천(Fortune)이 로스 페로(Ross Perot)에 대하여 내린 정의이다. 로스 페로는 1930년 텍사스 텍사카나에서 독실한 감리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1953년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한 그는 4년의 의무 복무 기간을 끝내고 1957년 제대한 뒤에 IBM의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그는 IBM에서 가장 성공적인 영업 사원으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IBM에서도 가장 수익성이 높으면서 까다로운 거래를 맡게 되었다. 상대는 사우스웨스턴 생명보험사와 텍사스 블루크로스 건강보험조합이었다. 사우스웨스턴 생명보험사는 당시 130만 달러를 주고 막 구입한 IBM 7070 컴퓨터의 용량이 필요 이상 크다고 생각하고 이를 IBM에 반송하려던 참이었다. 사우스웨스턴이 IBM 7070을 그대로 보유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페로는 사우스웨스턴 생명보험사의 IBM 7070 컴퓨터 여유분을 임대해 사용할 다른 회사를 찾아냄으로써 거대한 손실을 입을 뻔했던 거래를 깨끗하게 마무리하였던 것이다. 이 거래의 경험을 통해 페로는 소비자에게 컴퓨터를 판매하는 동시에 컴퓨터를 구입할 여유가 없는 다른 회사에 여유분을 빌려준다는 혁신적 아이디어에 착안하게 되었다. 곧바로 그러한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건의서를 작성해 상사에게 보고했지만 계획이 적절치 않다며 거절당하자 페로는 좌절하고 낙담하게 된다. 페로는 결국 자기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고 1962년 6월 32살의 나이로 IBM을 떠나게 된다.

“비즈니스는 운동경기를 할 때처럼 긍정적인 정신을 가지고 추구해야 한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있었던 페로는 컴퓨터 코드를 한 자도 몰랐지만 그는 아내로부터 빌린 1000달러짜리 수표 한 장을 가지고 컴퓨터 임대사업 구축의 길로 나서게 된다. 두려움을 모르는 그는 고도의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제공하는 혁신 업체이기보다는 고품질의 서비스 제공 업체인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즈(Electronic Data Systems, EDS)를 설립하게 된다. 처음 EDS는 1인 기업이었다. 페로는 컴퓨터 코드 작성이나 프로그래밍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강하고 긍정적인 낙천주의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정신자세로 무장된 직원들을 모집했다. 또한 남의 뒤를 쫓지 않고 혁신을 이룰 수 있는 독학 타입의 인물들을 찾았다. 이를 위해 그는 “독수리는 떼 지어 날지 않는다”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EDS의 초창기 고객은 중소기업이었다. 그러나 EDS가 더욱 정교한 소프트웨어를 개발함에 따라 포테이토칩 회사 프리토 레이, 메디케어 노인의료보험제도와 같은 대기업과도 계약을 맺었다. 1964년 12월이 되자 EDS는 12명의 직원과 총수입 40만 달러를 올리는 회사가 되었다. 그는 산업 전반을 전산화했고 그 산업 안에서 지배적인 역할을 하도록 회사를 창조하고 키웠다. 50억 달러에 이르는 일렉트로닉 데이터 시스템즈(Electronic Data Systems, EDS)의 연간 매출과 4만8000명의 직원들이 자신감 넘치는 페로의 마술을 증명하며 그의 기업가적 천재성을 입증해냈다.

1968년 EDS는 전국 메디케어 시스템 공급자로서 그해 총수입 750만 달러를 올리게 된다. 이때가 EDS 주식 상장의 최적기였고, 로스 페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1년 반이 지나자 주가는 162.50달러로 뛰었고 페로의 순자산은 15억 달러에 달했다. 그해 포천지는 이 성공적인 주식 상장에 대해 “미국 금융 사상 최고의 개인 성공”이라고 지적했다. 페로의 개인 재산은 1984년 EDS를 GM에 25억 달러에 팔면서 치솟았다. 1992년 2월, CNN의 ‘래리 킹 라이브’의 진행자 래리 킹이 인터뷰에서 페로에게 미국 대통령 후보로 나설지에 대해 물었다. 무소속으로 나선 페로는 입후보 초기 여론조사에서는 부시와 클린턴을 앞섰다. 그러나 선거운동이 진행되는 동안 페로는 가족 문제를 이유로 입후보를 철회하기도 하는 등 우여곡절을 겪기도 하면서 진지한 비즈니스맨의 면모를 보여줌으로써 페로는 무소속 후보로서 19%의 득표율을 기록했지만 당선에는 실패했다.

1988년 페로는 그가 기업계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비즈니스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기도 했다. ‘포브스’와의 인터뷰 중에 ‘훗날 자신이 어떤 사람으로 기억되기를 바라느냐’는 질문에 페로는 이렇게 답했다. “성공한 사업가나 실패한 사업가로 불리는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 다만 세계 도처의 어려운 이웃을 위해 노력했던 사회 활동가로 기억되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로스 페로는 지금까지 1억2000만 달러 이상을 기부한 존경받는 자선가이기도 하다.

/경상대학교 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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