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한가운데서
봄의 한가운데서
  • 경남일보
  • 승인 2014.04.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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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순 (전 진주여성민우회 부설 성폭력상담소장)
올해는 봄이 일찍 온 듯하다. 다른 해 같은 경우에는 꽃이 만발할 시점인 이즈음, 벌서 꽃이 지고 있다. 따뜻하긴 했지만 겨울은 겨울이라, 두꺼운 외투를 입고도 움츠리며 지내다가 환하게 꽃망울을 터트린 매화와 목련을 보고 ‘어머 꽃이 피었네!’ 했더니 어느 새 길거리는 떨어진 벚꽃 잎들로 가득하다.

봄! 참 찬란한 말이다. 땅이 부드러워지고 새싹들이 피어나고 봄의 향취를 돋우는 쑥, 냉이, 달래 같은 봄나물들이 고개를 내밀고…. 그리하여 만물이 소생하는 계절, 그래서 ‘봄’하고 소리를 내어 보면 몸이 가벼워지고 왠지 모르게 기운이 나는 느낌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하면 만물이 소생한다는 것, 죽었던 것들이 다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그리 가벼운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봄이 와서 우리 눈에 들어오는 광경은 밝고, 환하고, 하양, 분홍, 보라, 연두와 같은 매혹적인 색깔들로 채색된 풍경이지만 그 밝음, 그 환함, 그리고 그 색들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땅과 나무와 풀들은 춥고 어두운 죽음의 고통을 이겨내야 했다. 아니, 어쩌면 겨울은 오히려 고통의 감각을 무디게 하는 잠과 같았을 수도 있다. 봄이 와서 그 잠에서 깨어나 단단한 땅을 마주하고 힙겹게 새싹을 밀어 올리고, 꽃을 피워야 하는 고통이 더 처절했을지도 모른다.

아마 저 영국의 시인 T.S. 엘리어트는 황무지(荒蕪地)라는 제목의 시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를 봄비로 깨운다./겨울은 오히려 따뜻했다…’라고 한 것은 잠에서 깨어나 새롭게 시작하려고 애쓰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고통에 대한 공감인지도 모르겠다.

꽃, 나무, 풀과 같은 식물뿐 아니라 봄은 우리 인간, 그리고 동물들에게도 신체적으로 부담이 되는 계절이라고 한다. 겨우내 움츠리고 최소한의 에너지 소비만 하도록 만들어졌던 몸들이 햇빛과 기온의 변화로 인한 새로운 시간을 맞이하여 새롭게 몸의 시스템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우리들에게 큰 부담을 지운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시기가 되면 어르신들이 편찮거나 세상을 떠나는 경우가 많아진다고 한다. 춘곤증이나 환절기 감기와 같은 증상들 또한 그런 변화에 적응하려는 우리 신체의 ‘애씀’일 것이다.

이처럼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과정이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달리 우리의 몸과 마음에 알게 모르게 커다란 부담을 지우고 있다면, 그래서 엘리어트의 말처럼 ‘잔인하게’ 다가오고 있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천천히 그것을 맞이하고 천천히 그에 대응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 개인들도, 그리고 우리 사회도 어둡고 추운 겨울의 고통을 지니고 있다. 제주나 밀양 등 곳곳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리고 우리 대부분은 고통을 외면하는 겨울잠 속으로 피해 있었다. 그러나 원치 않아도 봄은 오고야 만다. 그것이 자연이고 그것이 삶이기 때문이다.

봄이 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고통에 마주 서는 일이다. 봄은 고통과 마주 서는 과정을 통해서 오기 때문이다. 단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그 과정을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다. 변화를 부정하거나 변화를 급격히 겪다보면 우리의 생명이 위태로워질 수도 있으므로 감당할 수 있을 만큼씩 천천히 진행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길이다.

이 봄의 한 가운데에서 분분히 날리는 꽃잎을 보며, 내가 그리고 우리가 겪어내야 할 고통과 천천히 마주칠 준비를 해본다.
강문순 (전 진주여성민우회 부설 성폭력상담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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