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 열전 <6>
진주 남강 절벽 바위글씨 인물 열전 <6>
  • 최창민
  • 승인 2014.04.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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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사오적 이지용을 질타한 기녀 산홍(山紅)
예로부터 진주는 ‘북평양 남진주’라고 불릴 만큼 전국에서도 매우 번창한 지역이다. 이에 따라 전국에 내노라하는 권력자는 물론 시인묵객들도 진주를 자주 찾았다. 이들의 잦은 방문으로 진주는 자연스럽게 교방문화(기생문화)가 발전하게 됐으며, 조선 8도에서도 그 명성이 자자했다. 특히 진주기생의 가무는 조선 제일이라고 일컬을 정도로 뛰어났으며, 충절과 정조가 두텁고 순박함으로 총애를 받아 왕실에서 베풀어지는 잔치에 불려나간 명기들이 많았다고 한다.

진주성 촉석루 아래 절벽 바위에는 주로 권력자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데, 기생의 이름도 각인돼 있어 눈길을 끈다. 그녀는 기생이라는 낮은 신분임에도 나라를 팔아먹는데 앞장 섰던 친일 매국노 이지용을 꾸짖어 민족의 정기를 지킨 ‘산홍’이다. ‘산홍’의 이름은 경남근대교육을 개척한 선구자 윤대선의 이름 위에 세로로 새겨져 있다. 다른 바위글씨들에 비해 너무 작아 외부에서 육안으로 찾기 힘들고, 배를 타고 들어가야 확인할 수 있으며, 여름철이면 숲이 우거져 더 찾기 힘들다.

‘山紅’이란 바위글씨를 누가 썼는지, 언제 새겼는지 알 수 없다. 다만 그녀의 기개와 충정에 감복한 한 사람이 정성을 들여 정을 쪼아가며 이름을 새겼을 것으로 짐작된다.

하강진 교수(동서대 영상미디어학부 영산문학전공)는 ‘진주 남강 절벽의 바위글씨로 읽는 근대 인물의 사회문화사’라는 논문에서 ‘동일인이라면’는 단서를 붙이긴 했지만 산홍의 출생연도와 출생지를 추정할 수 있는 기록을 소개하고 있다. 경상우도 암행어사 이헌영의 ‘교수 집략’에 “본고을 기생 산홍이 와서 맞이하니 듣건대 20세라 했다. 서울에서 한달전에 내려왔고, 서울에 있으면서 4년간 약방에서 일을 보다가 지금 비로소 고향에 돌아왔다고 하며, 또한 글을 잘 알았다”고 기록돼 있다. 이에 대해 하 교수는 “우연하게도 기녀 이름이 일치하고, 글을 잘 알았다고 했는데 만일 두 사람이 동일하다면 산홍의 출생연도는 1863년, 출생지는 진주로 추산할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논개사당인 의기사의 왼쪽 처마에 걸려 있는 산홍이 지은 시 ‘의기사감음(義妓祠感吟)’ 5언 절구를 보면 그녀의 기개와 충절이 느껴진다. 산홍은 시에서 진주성 내 임진왜란때 순국한 영령을 모신 의기사와 창렬사를 충절의 대명사인 ‘쌍묘’에 비유했으며, 거기다 충혼이 깃든 촉석루가 있어 진주의 의로움이 만고에 빛난다고 칭송했다. 또 당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음에도 벼슬아치나 사대부들이 한가하게 유흥만 즐기는 모습을 보고 이들을 ‘부끄러운 인생들’이라며 질타하고 있다.

산홍은 최고 권력자인 친일 매국노인 이지용을 ‘5적 우두머리’라고 꾸짖음으로써 조선 8도에 진주기생의 기개를 보여준다.

한말 애국선비 황현이 지은 ‘매천야록’ 광무 10년(1906) 조에는 “진주기생 산홍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이지용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고 기록돼 있다.

당시 이 사건은 ‘대한매일신보’에 보도되는 등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06년 11월 22일자 2면 ‘잡보’에 실린 보도를 보면 ‘대한매일신보’는 ‘지아비 답지 않은 의리(義不可夫)’ 제하의 기사를 보도하면서 ‘내부대신 이지용이 진주기생 산홍을 총애해 첩으로 삼기를 원하자 산홍은 세간에서 지목하고 있는 매국 적신(賊臣)과 함께 거처하는 것 보다 차라리 백정과 함께 하겠다’고 한 발언을 보도하면서 ‘신홍을 구타한 사람이 이지용이 아닌 남편’이라고 오보를 냈다. 다음날 11월 23일자 보도에서는 ‘산홍이 내부대신을 배척한 애국행위를 천심(天心)’이라고 극찬했다.

대한매일신보가 ‘산홍을 구타한 사람이 남편’이라고 오보를 내자 남편이 나서 이전의 기사 내용을 반박했다. 11월 24일자 3면 잡보에 ‘기녀 남편이 변명하다(妓夫辨明)’라는 제목으로 ‘산홍의 남편인 최기호가 본사에 변명하되 자신이 거명된 일은 한마디로 오해이고, 산홍이 매국의 수괴 이지용의 작첩을 거절한 행위는 의리에 따른 처신이었고, 만약 자신이 금권에 눈이 멀어 부인 산홍을 구타했다면 금수같은 존재라며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했다’고 보도했다.

이지용이 일본특사로 일본에 가자 대한매일신보는 11월 29일자에 ‘일본에 가서도 산홍이 같은 기녀에게 또 창피당할까 무섭다’는 만평을 실어 이지용을 조롱하기도 했다.

이 사건 발생 2년 후에도 이지용은 산홍을 막대한 금품으로 유혹하려다 또다시 망신을 당한다. 황성신문 1908년 2월15일자 2면에 ‘미인일소 경천금(美人一笑 輕千金)’이란 제목으로 ‘산홍은 친일파 전 협판 이봉래의 생일에 초대됐는데, 이날 중추원 고문 이지용은 명기 산홍의 한번 웃으면 백가지애고가 넘치는 탐해 1600환 가치되는 보석반지를 주고선 미친 듯 대취해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고 보도했다. 여기에서 황성신문은 산홍을 거금 앞에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 지조 있는 기녀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 기사들을 분석해 보면 산홍은 당시(1906년) 서울에서 생활했으며, 남편을 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이에 대해 하 교수는 “산홍은 자색과 문예가 뛰어나 약방기녀(藥房妓)로 차출된 까닭에 서울에 머문 것이 아닌가 한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지용을 준엄하게 질타한 산홍의 기개를 들은 한 선비는 ‘산홍의 추상같은 충절이 그 어떤 황금으로도 매수할 수 없는 고귀한 것’이라며 칭송하고, ‘매국노에게서 벼슬 한자리라도 꿰차려고 물불을 가리지 않는 썩어빠진 관리들을 조롱’하는 칠언절구를 짓기도 했다.

그러나 경상남도관찰부 관기였던 산홍이 진주에서 언제 서울에 갔는지는 확실치 않다. 아마 1894년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철폐됨에 따라 ‘관기 제도’가 폐지되면서 경상남도관찰부 관기들도 해산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관기는 이후에도 당분간 지속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산홍도 관기가 해산되면서 진주에서는 먹고 살길이 막막해 서울로 올라왔을 것으로 추측될 뿐이다.

산홍은 이지용의 집요한 강요와 압박을 견디다 못해 자결을 선택한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시가 있다. 양회갑의 문집 ‘정재집’에는 ‘기녀 산홍이 매국노에게 죄를 질책하며 잠자리를 거절하고 스스로 죽다(妓山紅數罪賣國賊 不許寢自死’라는 시제가 수록돼 있다. 이 시에서 양회갑은 산홍을 의기 논개와 충랑 계월향과 함께 열녀라고 표현하며, 어떤 역적(이지용)의 권력과 횡포에 항거하다 한 조각 상여 타고 저승길로 떠났다고 읊고 있다.

하 교수는 “산홍과 이지용의 삶은 국운이 쇠망일로로 치닫던 시기에 극명하게 대조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들이다”고 밝혔다.

‘산홍’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는 ‘이지용’의 이름이 새겨진 바위 뒤쪽에 가려져 있다. 살아서도 매국노에게 핍박을 받더니 죽어서도 그에게 가려져 있는 기막힌 현실이 씁쓸할 뿐이다. 어찌 보면 ‘산홍’이 ‘이지용’의 이름을 보기 싫어할 것이라고 생각한 각자인이 ‘산홍’의 이름을 반대편 바위에 새겼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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