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뜰수록 앞이 깜깜해진다고?
눈을 뜰수록 앞이 깜깜해진다고?
  • 경남일보
  • 승인 2014.05.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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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청 (시인, 진주제일여고 교사)
어느 시인은 말하였다. ‘눈을 뜨고도 눈을 뜨고 싶다’고. 그리고 또 ‘눈을 뜰수록 앞이 깜깜해진다’고. ‘눈을 뜰수록 깜깜해지다’니? 세상에 봉사가 아닌 바에야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겠는가? 모순도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다. 그러나 때로 모순 속에 강한 진리가 들어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시인의 언술도 마찬가지다. 요즘 세상을 보면 너무 당연한 것 같은데 앞이 캄캄하다. 앞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한 마디로 막막하다. 가끔 눈을 확 뜨게 하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잠시 그때뿐이다.

우리들은 평소 눈을 뜨고 너무 많은 것들을 보면서 살아가고 있다. 눈과 귀를 통해 온갖 새로운 사건들을 접하고 있지만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다. 우리들이 살고 있는 곳은 10년 전, 아니 20년 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사건이 그 모습만 달리 해서 다시 일어나고 있는 세상이다. 조변석개라고 할 정도로 엄청나게 변했다는데 왜 이럴까? 수많은 분야에서 세계 일류를 자랑하고 많은 사람들이 선진국의 문턱에 턱걸이할 정도는 된다고 자부하는데, 20년 전과 마찬가지로 세 모녀가 오히려 미안해하며 자살하고, 왜 대형 사고는 되풀이되는가? 그것은 아마도 우리가 제대로 볼 수 없어서 그렇지 사실은 20년 전과 별반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거에 비해 문명사회가 되었다는데 20년 전보다 생명을 더 존중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자본은 무소불위를 힘으로 더 활개를 치고 있다.

우리의 의식이 별로 달라지지 않았기에 인터넷시대의 도래로 지식과 견문이 엄청 넓어졌음에도 우리네 일상의 틀은 항상 그대로이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바라보는 눈이 달라지지 않으니 새로운 사물이나 사건도 새로운 것이 될 수 없다. 새 옷이 나오면 그냥 사서 입으면 되는 것이고, 새 차가 나오면 그냥 타면 되는 것이다. 다른 것을 생각할 겨를도 없고,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 눈을 뜰수록 눈에 익숙한 것만 들어오고, 그 이상의 것은 보지 못한다. 이것이 의식의 관습이다. 우리들은 쉽게 이러한 타성에 젖게 될 뿐만 아니라 이러한 타성에서 벗어나기도 힘들다. 시력검사를 여러 번 해 본 사람은 안다. 나중에는 시력검사판의 숫자와 글자와 그림과 지시봉의 흐름까지도 대충 외우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의사가 지시봉을 짚으며 물을 때마다 자신이 이미 외우고 있는 것에 집중하여 생각하고 대답한다. 자신의 시력이 미치지 못하여 글자나 그림이 애매한 경우에는 더욱 다른 것을 보지 못한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통해서만 보려고 한다. 왜 그럴까? 관습이나 관행의 울타리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들이 바라보는 눈은 관습의 눈인 셈이다. 관습의 시력과 시야를 아무리 바꾸어 봐야 이미 알고 있는 것 이상을 볼 수 없다. 익숙한 것만이 타당한 진리이고, 그 길만이 길로서 다가온다.

그래서 우리들은 가끔 눈을 감을 필요가 있다. 정말로 눈을 감으라는 말이 아니라 눈을 감고 익숙한 것들로부터 벗어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눈에 익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대신 눈을 감으면 새로운 세계가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우리는 눈을 감고 새로운 눈을 뜨는 존재가 되어야 새로운 세상을 맞이할 수 있다. 왼쪽 눈을 감고 오른쪽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두 눈 다 감고 보아야 한다. 눈을 감고도 또 눈을 감아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관행과 시스템에서 탈피할 수 있다. 오래 묵은 관행을 깨고 새로운 틀을 만들어 새로운 세계로 진입할 수 있다.

우리는 과연 ‘검은 자위가 초콜릿처럼 뚝뚝 흘러내릴’ 만큼 처절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까? ‘눈을 뜨라고 하지 않았’는데 하루도 못 견디고 금방 눈을 뜰지도 모른다. 이것은 마치 산소호흡기도 없이 코로 숨통을 막고 물속에 들어가 있는 것보다 더 힘든 일이기 때문이다. 물고기로 진화하지 않는 다음에야 숨을 쉬는 관습을 어찌 억누를 수 있을까? 그렇다. ‘눈을 감는’ 일은 그만큼 고통스러운 일이다.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을 견디어야 새롭게 진화한 족속이 될 수 있다. 생물학적인 진화만이 진화가 아니지 않은가.

 

하재청 (시인, 진주제일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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