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화선지
5월의 화선지
  • 경남일보
  • 승인 2014.05.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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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외남 (사천축동초등학교 교사)
계절의 여왕답게 햇살은 눈부시고 신록은 우거지는데 마음은 수묵화마냥 무채색이다. 운동장에서 노닐다가 하늘로 푸드덕 날아오르는 참새들, 화려하게 피었다 하롱하롱 지는 꽃잎을 보아도 진도 바다에서 사라져 간 생명들이 생각 나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지난 주말에는 강산이 몇 번 바뀔 만큼 긴 세월이 흘러도 잊지 않고 찾아와 감동을 주는 삼장 제자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노라니 모처럼 마음이 환해졌다. “선생님, 저 누군지 알겠어요?”라며 이름을 맞춰 보라는 얼굴이 있어 의아해했더니 제자의 친구였다. 위암 말기인데 전이가 심해 수술도 못하고 절망하던 친구를 상훈이가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거의 매일 지리산에 오르내리고 약초를 캐는 등 자연 속에서 지내며 농사일을 같이하다 보니 암세포가 30%나 줄었다고 한다.

내가 지은 동화를 들려주며 효성과 우애, 우정과 믿음의 뿌리를 내려주기 위해 노력했던 시간이 헛되지 않았는지 제자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사람들이 우리를 부러워할 만큼 우정이 두터운 것은 초등학교 5, 6학년 2년 동안 선생님이 많은 추억을 만들어 주신 덕분입니다.” 점심시간, 학교 앞 냇가에 모여 가재를 잡고 물장구도 치고 숲에서 달리기도 하며 우정을 쌓던 아이들이기에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조건 없는 순수한 사랑을 나누는 것이리라. 작은 사랑을 잊지 않고 큰 사랑으로 보답해 주는 고마운 제자들. 초등학생 어머니가 된 지금도 6학년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는 태점, 희정, 선순, 은아, 도순, 현진…. 장작불 옆에서 별과 추억을 세며 밤을 지새우던 상훈, 선호, 재일, 승준, 은환, 용덕, 종철…. 이름만 불러도 추억이 은비늘처럼 여울지는 그리움을 달래며 편지를 읊조려 본다.

“오랜 시간만큼 모든 것이 변했지만 선생님과 함께 보낸 초등시절의 느낌은 마음속 한 곳을 차지하고 그때 그 모습 그대로 남아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힘이 되고, 또한 자식들에게 아빠의 초등시절을 자랑 삼아 이야기할 수 있어 행복합니다.” -종철-

6학년 여름방학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하던 날, 최선을 다하라며 안아주었을 때 느꼈던 엄마품 같은 포근함, 선생님 집은 웅장할 줄 알았는데 자기 집과 비슷해서 놀랐다는 선호 이야기는 초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불쑥 던진 말 한 마디, 행동 하나하나가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 일깨워주었다.

침몰하는 세월호 안에서 제자들과 운명을 같이한 단원고 선생님들, 다른 생명을 구하기 위해 자기 생명을 바친 이들의 거룩한 희생을 생각하면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과 사명의 존귀함이 느껴진다. 가족과 제자들이 곁에 있고,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니 소소한 일에도 온 정성을 쏟아야겠다. 비바람에 흔들려야 향기를 더 멀리 풍기는 꽃과 어둠에 갇혀야 빛을 뿜어내는 별처럼 제자들이 고난에 직면할지라도 슬기롭게 극복하며 어둔 세상을 밝히는 등불이 되기를 바란다.

서외남 (사천축동초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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