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이 넉넉한 사람이 그립다
그늘이 넉넉한 사람이 그립다
  • 경남일보
  • 승인 2014.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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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숙자 (시인)
흔들리는 오월의 산책길, 담장마다 온통 붉은 장미의 세상이다. 경계의 정점을 찍고 있는 것이 화려한 장미인 게 다행인가 싶다가도 어질어질 꽃멀미가 난다. 하얀 머릿수건을 한 어머니나 누이동생의 은은한 향기를 닮은 정감 넘치는 찔레꽃 울타리는 이제 볼 수 없는 건지 살짝 아쉬운 마음이다.

부산의 한 단독주택에서 백골 시신이 발견됐다. 사망한지 5년이 지나서야 60대의 노인이 발견되었다. 언제 사망했는지조차 모를 정도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발견된 남성, 집주인에게 유서를 남기고 숨진지 4일 만에 발견된 여성 등 고독하게 죽어갈 동안 사람들의 무심함에 전율을 느낀다. 이처럼 사망한지 한참이 지나거나 시신이 부패한 후 발견된 고독사가 지난해에만 1717건이나 있었다.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연간 1만1000명이나 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들도 빛나는 인생의 한 갈피에는 부모, 형제, 자식들과 함께 행복했던 한때가 깨알같은 추억으로 남아 있으리라. 외로움과 가난이 형벌처럼 느껴질 때 따뜻하게 손 내밀어 줄 가족은 어디로 다 가버렸는지, 안부 한마디 건넬 세상의 그늘은 없었는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나는 한그루 나무의 그늘이 된 사람을 사랑한다/햇빛도 그늘이 있어야 맑고 눈이 부시다/나무 그늘에 앉아/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살을 바라보면/세상은 그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호승 시인의 ‘내가 사랑하는 사람’ 가운데 나오는 시다.

세상의 아픔을 헤아려 주고 보듬어 줄 수 있는 넉넉한 그늘의 품이 그립다. 마을의 수호신인 정자나무 그늘 아래서 마을 사람들은 살아갈 힘을 얻고, 한 집안의 가장도 그늘이 넓어야 가족들이 안정되고 편안한 삶을 살 수가 있는 이치이다. 든든한 나무그늘 아래서 올려다보는 하늘은 벅차고 설렌다.

사람 사는 세상이니 나라 안 참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고 감자꽃 찔레꽃을 닮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거리로 나서서 노란리본을 달고 촛불집회도 하고 세상을 향해서 호소하고 있다. 일그러진 영웅뿐인 시대의 참담함, 답답한 세상에 숨이 막히고 마음이 헛헛하고 자주 울컥거린다.

개인적인 책임의식은 강조되면서 사회적인 책임의식은 흐릿하기만 하다. 이젠 개인의 책임보다는 사회적인 책임 시스템이 적극 가동되어야 한다. 살아온 삶의 공식들이 물질에만 노출되어서 돈이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결과만 좋다면 무마해 주고 넘어가는 성공신화에 심취하여 달려온 결과이다. 결국에는 국민 행복시대가 아니라 국민 절망시대가 된 셈이다.

시대의 우울이 강물이 되어 흐르지만 절망의 강을 건너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젠 더 이상 방관하여 참지 말고 작은 목소리가 큰 울림이 될 때까지 힘을 내야 한다. 삶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것이 있다면 정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삶의 절대적 요소들을 결정하는데 막대한 영향을 끼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무지하고 무심하다.

이번 6·4 지방선거를 통해서 국민의 권리와 의무인 투표를 함으로써 세상을 환하게 밝혀야 한다. 눈 밝은 유권자가 되어서 우리 삶의 어두운 그늘을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을 가려 뽑아야 한다. 장밋빛 공약에 현혹당하지 말고 진실과 정의를 제대로 챙겨볼 수 있는 사람에게 올바른 한표를 행사해야 한다.

세상은 결코 저절로 좋아지지 않는다. 나무의 그늘이 깊어질수록 시간이 지나면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희미해지고 경험은 지혜가 되는 법이다. 눈물의 힘, 상처의 힘, 슬픔의 힘은 우리를 단단하게 키워낼 것이다. 화려한 장미 울타리도 아름답지만 반짝반짝 별빛같은 찔레꽃 울타리도 있음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잔인한 봄날은 간다.

황숙자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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