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없는 선거문화에서 유권자의 책임
철없는 선거문화에서 유권자의 책임
  • 경남일보
  • 승인 2014.06.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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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창술 (경남과학기술대 전자상거래학과 교수)
예부터 우리 선조들은 24절기를 모르면 ‘철부지’라고 했다. ‘철을 모른다’는 것은 지금이 어느 때인지, 무엇을 해야 할 때인지를 모른다는 뜻이다. 즉 씨를 뿌려야 할 때인지, 채소밭을 갈아야 할 때인지를 모른다는 말이다. 어릴 때 멋모르고 읽었던 한 소설에 ‘철이 든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그때는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성장하고 나서 생각해 보니 어느 정도 이해가 간다.

우리는 누구나 어렸을 적 자신은 특별하다고, 세상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 세상을 구해야 하는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자기 자신이라고 상상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자신을 중심으로 세상이 공전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이는 갈릴레오 이전의 사람들이 태양계가 지구를 축으로 공전하고 있다고 여긴 것과 비슷해 보인다. 옛날 사람들에게는 갈릴레오라는 선각자가 있어 그들이 철이 들도록 할 수 있었지만, 오늘날 개인에게는 세상의 중심이 자신이 아닌 다른 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줄 선각자의 존재가 확실치 않다. 그렇기에 오늘날 개인은 자신의 노력만으로 자신이 철이 들도록 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철이 든다는 것, 그것은 누구나 다 거쳐가야 하는 과정이지만, 잘 거쳐 나가기는 쉽지 않다. 또 어느 소설에서 ‘우리 세대의 인간들은 뭐 하나 하는 데에도 가이드북이 필요했다’라고 한 것이 기억나는데 철이 드는 법에 대한 가이드북이 없는 현실에서, 설사 있다 하더라도 세상이 변화하는 속도에 맞게 개정판이 나오지 않는 현실에서 철이 드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는 자세만이라도 갖추고 있다면 시간은 걸릴지라도 가능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선거문화는 철이 덜 들기로 유명하다. 이번 6·4 지방선거 역시 철이 덜 든 상태로 치러진다. 기초지방선거는 기성 정당정치의 정치근육과 다른 근육을 필요로 하는데도 철이 덜 든 세력들에 의해 ‘정당공천제 유지’라는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채로 굴러 왔고, 세월호 참사로 인해 그나마 조용한 선거와 정책대결을 표방하던 분위기가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예전과 별반 차이 없이 묻지마 개발·예산의 엉터리 공약, 묻지마 비리 등으로 ‘진흙탕’ 선거판이 재현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이번 선거에 그나마 마지막으로 기대해 보는 건 유권자이다. 2012년 말쯤인가 맥주업체가 무상으로 제공하는 생맥주 잔의 용량을 속인 게 탄로 나 우리를 분노하게 만든 적이 있다. 더구나 생맥주를 잘못 따르면 거품만 가득하게 된다. 잠시 후 거품이 빠지고 나면 진짜 맥주는 반도 안 채워진 것을 알고 실망하게 된다. 민주국가에서 선거는 정치적 의제가 설정되는 중요한 기회다. 의제는 공공성과 책임의식에 기초하여 현실성 있는 정책으로 구체화되어야 한다. 그런데 선거만을 의식해서 묻지마 공약들이 쏟아지지나 않았는지, 인기만을 의식해서 검증되지 않은 정책들이 앞으로 펼쳐지지나 않을 건지, 그래서 거품 생맥주처럼 되는 것은 아닌지 유권자는 철저히 검증해야 한다.

유권자의 역할과 관련해 이런 우화도 있다. 멧돼지를 포획한 초보 사냥꾼이 도살꾼에게 먹을 수 있게 장만해 달라고 부탁했다. 도살꾼은 깔끔하게 장만한 뒤 “아니, 이 멧돼지는 쓸개가 없네요”라며 혀를 끌끌 찼다. 초보 사냥꾼은 예사로 그냥 넘어갔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살꾼이 멧돼지의 가장 중요한 부위인 쓸개를 ‘슬쩍’한 사실을 뒤늦게 안 것이다. 그제야 초보 사냥꾼은 ‘사람을 함부로 믿어서는 안 되는구나. 언젠가는 들통 날 뻔한 거짓말을 저렇게 태연스럽게 하다니. 나도 어쩜 그렇게도 홀라당 넘어갔을까’라고 한탄했다. 이렇듯 유권자가 공약과 정책을 잘 거르지 못한다면 하소연조차 할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삶이 보다 윤택해지기 위해서는 실현가능한 양질의 정책들이 제시되고 제대로 실현되도록 모두 관심을 가져야 한다. 비록 철이 들지 못한 선거문화 속에서 우리들 유권자만이라도 철 든 한 표를 소중히 행사하길 바란다.
윤창술 (경남과학기술대 전자상거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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