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귀영화 버리고 수도자의 길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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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명식
  • 승인 2014.06.1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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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여행 속으로] 가야국 일곱 왕자 성불 전설 '칠불사'

아자방



중·고등학생 시절 한국사 시간에 ‘고구려는 소수림왕 2년(372)에 전진의 스님 순도가,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에 동진의 스님 마라난타가, 신라는 눌지왕(420)때 고구려의 스님 묵호자가 불교를 전파했다’는 것을 머리 아프게 외었던 기억이 있다. 중등학교 교과서에 의하면 우리나라 불교 역사는 1700년에 이른다.

그렇지만 이 시기 보다 300년이나 앞선 시기에 불교가 전래됐을 것이라는 설화를 간직하고 있는 사찰이 있다. 하동군 화개면 범왕리 지리산 자락에 있는 ‘칠불사(七佛寺)’다. 김수로왕과 허황후의 일곱 왕자들이 지리산 토끼봉의 해발고도 830m 지점에 암자를 짓고 수행하다가 103년 8월 보름날 밤에 성불했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곳이다. 즉, 일곱 왕자가 성불했다고 해 ‘칠불사’라고 이름이 지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성불한 일곱 왕자와 허황후의 아련한 사연도 칠불사에 녹아 있다.

칠불사는 가락국 김수로왕의 일곱 왕자가 101년에 창건하였다는 설이 구전으로 내려오고 있으나, 언제 창건되었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곱 왕자의 창건설이 확인되면 우리나라 불교 역사는 300년 가까이 앞당겨진다. 창건 이후 칠불사는 1568년(선조 1)과 1830년(순조 30)에 중창건되기도 했다. 1948년 여수·순천 사건으로 완전 소실되어 오랫동안 재건되지 못하였다가, 1978년 이후 다시 중창건되면서 지금의 형태를 갖추었다고 한다.

시간을 2000년 전으로 거슬려 가야국 건국(서기 42년) 시기인 김수로왕(재위 42~199년) 시대. 가락국 김수로왕과 허황후에게 아들이 10명 있었는데, 첫째 왕자는 태자가 돼 왕위를 계승했고, 둘째와 셋째는 어머니인 허황후의 성씨를 잇게 해 ‘김해 허씨’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일곱 왕자는 속세와 뜻을 끊고 외삼촌인 장유보옥(長遊寶玉) 화상을 스승으로 모시고 출가, 수도해 성불했다고 한다. 일곱 명의 왕자는 장유화상을 따라 김해 장유사에서 처음 수도를 했고, 가야산에 들어가 3년동안 불법을 닦았다. 허황후가 왕자를 보기 위해 자주 가야산을 찾자 장유화상은 수도에 방해가 된다며 왕자와 함께 지리산(하동 칠불암)으로 들어갔다. 일곱 왕자는 이곳에서 꼬박 2년을 수행하고, 성불이 되었다고 한다.



칠불사

 
◇영지에 얽힌 김수로왕·허황후·일곱 왕자의 전설

허황후의 오빠 장유화상과 일곱 왕자가 지리산 칠불암에 들어간 후 세월이 흘려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일곱 아들이 수도하여 성불하였다는 소식을 듣는다. 아들을 보고 싶은 마음에 김수로왕과 허황후는 직접 지리산 칠불사를 찾아간다. 칠불사 앞에서 아들을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불법이 엄격하여 사찰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할 뿐더러 아들을 만날 수도 없었다. 심지어 성불한 일곱 아들도 김수로왕과 허황후를 만나고자 하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허황후는 몇 날을 기다리며 아들의 얼굴만이라도 보기를 청했다. 이에 일곱 아들은 직접 만날 수는 없고 사찰 앞에 있는 연못에 그림자를 비추어 어머니 마음을 위로하라고 했다. 그러자 연못에 일곱 아들의 얼굴 그림자가 비춰지고 모두 생불이 되어 하늘로 오르고 있었다. 허황후는 연못에 비친 아들의 얼굴 그림자를 본 후 돌아갔다고 한다. 이후 이 연못을 칠불의 그림자가 비쳤다고 해 ‘영지(影池)’라 부르게 되었다. 당시 김수로왕이 머물렀던 마을은 ‘범왕촌(梵王村)’이라 하였는데, 범왕촌은 현재 하동군 화개면의 범왕리(凡王里)가 되었으며, 허황후가 머문 곳은 ‘대비촌(大妃村)’이라 했으며 현재 대비리(大比里)라 부른다고 전한다.

영지는 본래의 자리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칠불사 창건 당시 영지의 원형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는 둥근 모양의 연못이다.



◇불가사의한 온돌방 ‘아자방(亞字房)’

신라 효공왕(897~911년) 때 담공선사가 칠불사에 와서 벽안당 선실을 아(亞)자형의 2중 온돌방으로 축조하였다고 한다. 한 번 불을 지피면 상하 온돌과 벽면까지 49일 동안 온기가 가시지 않는 ‘이중온돌 공법’이라는 불가사의한 기법으로 인해 ‘세계건축사전’에 올라 있다. 방안 네 귀퉁이에 70cm씩 높인 곳이 좌선처이며, 가운데 십자 모양의 낮은 곳이 행경처이다. 100명이 한꺼번에 좌선할 수 있는 방으로, 건축 이래 한 번도 보수한 적이 없다. 1976년 12월 20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144호로 지정되었다.

아자방은 동국 제일 도량으로 역대에 무수한 도인을 배출했다. 고려시대의 대선사인 청명 화상을 비롯해, 조선 중종 대 추월·조능 선사 등이 대표적이다. 특히 아자방(亞字房)은 세계건축대사전에 기록되어 있을 만큼 독특한 양식으로, 서산대사가 좌선한 곳이자 1828(조선 순조 28) 대은선사가 율종을 수립한 곳으로 유명하다. 이 온돌은 만든 이래 1000여년을 지내는 동안에 한번도 개수한 일이 없다고 한다.


영지

 

◇한국 불교 역사는 2000년

제정 스님은 지난 5월 17일자 불교신문 특별기고를 통해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에 왕에게 불상과 경문 보내왔음은 왕실이 불교를 인정했다는 것이지 초전(최초로 전해진 시기)은 아니다. 가락국으로 전법된 불교를 제대로 인정하면 우리불교 역사는 1700년이 아니라 2000년이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삼국사기에서 고구려 소수림왕 2년(서기 372년)에 불교가 전래됐다는 기록은 보수적인 왕실, 즉 국가에서 불교를 인정함을 뜻하는 것이지 최초로 전해진 시기는 이 보다 휠씬 앞설 수 밖에 없다는 것. 제정 스님은 “모든 불자, 언론, 종단에서는 역사의 위상에 맞게 2000년이라고 자랑스럽게 여기고 표기도 바르게 해줄 것을 바란다”고 강조하고 있다.

칠불사의 전설에서 김수로왕이 자신의 아들들을 불교에 출가시킬 정도였다는 것은 이미 가야국에는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으며, 국교로까지 인정받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특히 ‘삼국사기’와는 달리 ‘삼국유사’에는 바다를 통해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남방(허황후의 아유타국)에서 불교가 먼저 우리나라에 전래됐다는 ‘삼국유사’ 기록과, 허황후가 서역의 아유타국으로부터 김수로왕에게로 올 때 가져온 파사석탑(도 문화재자료 제227호), 일곱 왕자의 성불 등 칠불사에 얽힌 전설 등을 종합하면 가야국 건국 당시에 이미 불교가 성행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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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영창준파파 2014-12-11 12:10:45
좋은걸 알게되어 기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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