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연 (경남과학기술대 학보사 편집국장)
이견은 때론 내 안에서의 다툼이 되고 곧 그 모난 존재의 씨앗을 밖으로 내보내야 할 시간이 온다. 때로는 더 나아가기 위한 도약에 앞서 혹은 굽히지 못한 자존심에 의해 모난 것을 자신의 밖으로 뱉어내게 된다. 그것이 밖으로 나가떨어질 때 우리는 시원섭섭해 하기도 하고 이리저리 굴러다니며 헤집어 놓아 상처 난 곳을 더듬더듬 어루만지며 그 모난 것을 미워하기도 한다.
여기서 모난 존재는 모두에게 제각각이다. 모남이 눈에 보이는 것, 나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힌 상대방의 의도적인 독설이나 트라우마로 여기는 것, 이따금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숨고 싶어 얼굴을 붉히게 하는 것 혹은 단지 다르다는 것 등 무엇으로 여기든 상관없다. 그렇게 여겨지는 것을 떠올려 본다. 재즈를 사랑하지만 ‘락’은 음악이 아닌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나, 동물을 사랑하지만 ‘고양이’는 싫어하는 나, 의견 충돌이 빈번한 ‘친구’를 피하는 나. 이렇게 표현해 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이 짧은 문구의 중심 단어를 다르게 생각해 보게 됐다. 재즈를 사랑하지만 락은 음악이 아닌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나’, 동물을 사랑하지만 고양이는 싫어하는 ‘나’, 의견 충돌이 빈번한 친구를 피하는 ‘나’. 바로 이렇게 말이다. ‘나’라는 구성의 집합체는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배척하여 하나의 바스켓 속에 개성이라는 이름 하에 담았다. 어쩌면 개성의 이면은 내가 아닌 것을 배척하는 우물 안의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작은따옴표 하나에도 이렇게 모난 존재는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모난 존재는 애초부터 없었고 그 존재는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게 무형의 어떤 것을 마음의 짐처럼 싣고 이리저리 스스로 굴리며 상처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프고 수용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면서도 자신에게 자꾸 괴로움을 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조금 괜찮아져도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기에 받아들이는 방법은 연습하지 않는다. 가령 깨진 유리조각을 밟았을 때 그것이 처음이라면 우왕좌왕하겠지만 그 이후엔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상처를 덮을 줄 알게 된다. 더 앞서 유리가 깨질 것을 염려해 더 주의하고 조심할 수도 있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여태 생각해 왔던 모난 것의 중심을 옮겨 나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그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라는 구성이 만들어질 땐 나와 다른 것이 있기에 완성이 된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닌 줄은 알면서도 닥쳐오는 상황엔 대처하지 못하고 튕기어 낼 뿐이다. 스스로 늘 상기시켜 본다. 다르다는 것을 모나다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 또 받아들이는 방법을 연습할 것. 이따금 미워함으로써 이별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다시 안고 갈 수 있게.
여기서 모난 존재는 모두에게 제각각이다. 모남이 눈에 보이는 것, 나의 마음에 비수처럼 꽂힌 상대방의 의도적인 독설이나 트라우마로 여기는 것, 이따금 머릿속에 떠오를 때마다 숨고 싶어 얼굴을 붉히게 하는 것 혹은 단지 다르다는 것 등 무엇으로 여기든 상관없다. 그렇게 여겨지는 것을 떠올려 본다. 재즈를 사랑하지만 ‘락’은 음악이 아닌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나, 동물을 사랑하지만 ‘고양이’는 싫어하는 나, 의견 충돌이 빈번한 ‘친구’를 피하는 나. 이렇게 표현해 보았다.
그리고 필자는 이 짧은 문구의 중심 단어를 다르게 생각해 보게 됐다. 재즈를 사랑하지만 락은 음악이 아닌 발악이라고 생각하는 ‘나’, 동물을 사랑하지만 고양이는 싫어하는 ‘나’, 의견 충돌이 빈번한 친구를 피하는 ‘나’. 바로 이렇게 말이다. ‘나’라는 구성의 집합체는 어떤 것은 사랑하고 어떤 것은 배척하여 하나의 바스켓 속에 개성이라는 이름 하에 담았다. 어쩌면 개성의 이면은 내가 아닌 것을 배척하는 우물 안의 나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작은따옴표 하나에도 이렇게 모난 존재는 내가 될 수도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모난 존재는 애초부터 없었고 그 존재는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다. 그렇게 무형의 어떤 것을 마음의 짐처럼 싣고 이리저리 스스로 굴리며 상처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아프고 수용하지 못할 것을 염려하면서도 자신에게 자꾸 괴로움을 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조금 괜찮아져도 누구도 가르쳐 준 적이 없기에 받아들이는 방법은 연습하지 않는다. 가령 깨진 유리조각을 밟았을 때 그것이 처음이라면 우왕좌왕하겠지만 그 이후엔 소독하고 연고를 바르고 상처를 덮을 줄 알게 된다. 더 앞서 유리가 깨질 것을 염려해 더 주의하고 조심할 수도 있다. 하물며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까. 여태 생각해 왔던 모난 것의 중심을 옮겨 나로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면 그게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의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라는 구성이 만들어질 땐 나와 다른 것이 있기에 완성이 된다. 다른 것이 틀린 것이 아닌 줄은 알면서도 닥쳐오는 상황엔 대처하지 못하고 튕기어 낼 뿐이다. 스스로 늘 상기시켜 본다. 다르다는 것을 모나다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 또 받아들이는 방법을 연습할 것. 이따금 미워함으로써 이별해야 하는 모든 것들을 다시 안고 갈 수 있게.
나연 (경남과학기술대 학보사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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