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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구열전 <9>조준언 경남배구협회 부회장"배구 가르치는 재미에 빠져 살았네요"
최창민  |  cchangmin@gn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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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07.03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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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준언 경남배구협회 부회장
 
“배구를 가르치는 재미에 빠져 배구가 인생의 전부인 것처럼 살았습니다.”

조준언 경남배구협회 부회장(57·이하 조 부회장)은 자신과 함께해 온 배구에 대해 이렇게 정리했다. 인생의 희로애락처럼 곡절 많았던 배구의 삶이 되새겨지는 듯했다.

“고등학교 선수시절, 배구선수라면 누구나 선호하는 경기대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지만 부모님의 권유와 학생선수들을 가르치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에 지역의 경상대학교에 진학했습니다.”

실제 조 부회장은 1981년 경상대학교 체육교육과에 입학한 뒤 배구선수로 활약하면서도 김형필 감독 하에서 동명고 선수들을 지도하는데 더 열정을 쏟는다.

조 부회장은 이후 7년 동안 대학생활을 제쳐두고 선수들을 가르치게 된다. 지도 스타일은 와일드했다. 좋게 말해 와일드지 독하게 훈련시켰다는 말이 더 옳다. 웨이트 트레이닝이나 체력훈련을 강하게 시켰다. 공과 한몸이 될 수 있도록 지겹도록 공과 놀게 했고, 강한 체력을 위해 오래달리기와 진양호 계단 뛰기를 혹독하게 시켰다.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김형필 감독의 영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조 부회장 자신에 대한 채찍이기도 했다. 자신 역시 고등학교와 중학교 선수들을 번갈아 가르치며 점심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로 빡빡한 스케줄을 소화했다.

“잠 잘 시간도 부족했습니다. 요즘 같으면 선수들이나 나 자신이 그렇게 할 수 없지요. 당시에는 지도를 위해서 당연히 필요한 것이었습니다.”

결국 조 부회장은 대학 3학년 때 대학생활까지 포기한다. 7년 동안 빠져 살았던 지도자 생활이 더 좋았던 것이 이유였다.

결과 역시 좋았다. 1984년 대구에서 열린 전국체육대회에서 동명고를 전국 최정상에 올려놓는다. 전국 최강인 인창고를 무너뜨린 것이다. 당시 멤버는 김양수와 황현주 등 키 작은 선수들로 구성됐다. 이들이 상대를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은 오로지 빠른 공격과 빠른 수비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키 큰 선수들은 긴 토스와 타점 높은 스파이크가 주류였으나 우리 선수들은 키가 작기 때문에 순발력을 이용한 스피드밖에 없었습니다.”

공격 시에는 공을 네트 가까이 재빠르게 붙이고 수비가 준비하기 전에 다람쥐처럼 공격을 이미 끝내 버리는 것이다. 단신의 장점인 순발력으로 키 큰 선수들의 약점을 파고드는 형태였다.

“빠른 배구를 구사하는 우리 선수들 때문에 당시 배구계에서 큰 이슈가 됐죠.”

선명여고로 자리를 옮긴 조 부회장은 1993년에 또다시 선명여고를 전국체전에서 여고부 우승을 이끌어 낸다. 광주에서 열린 전국체전이었는데, 홈팀인 광주 송원여상을 극적으로 따돌리고 금메달을 획득했다.

조 부회장은 “1984년 동명고, 1993년 선명여고가 전국체전에서 우승한 것이 당시 지도자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그러나 그는 항상 마음에 짐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던 것이 발목을 잡자 지도자 생활 7년 만인 1988년 다시 경상대학교에 복학한다. 1990년 대학을 졸업하고 선명여고에서 전국체전 우승과 전국대회 우승을 밥먹듯이 하며 지도자 생활을 이어갔지만 교사 발령을 받는데 실패하며 약간의 좌절을 겪기도 한다.

현역시절 그는 잘나갔다. 고등학교 때 청소년 국가대표가 된 레프트 김형태와 어깨를 견주며 센터 역할을 훌륭히 수행했다.

“김형태(과학기술대 배구감독)와 함께 뛰었습니다. 김 감독은 실력을 인정받아 경기대학교에 진학했으나 저는 지역에 남았지요. 후회는 없습니다. 무사히 지도자 생활을 마치고 작은 사업도 하고 있으니까요.”

선수시절 큰 부상은 없었으나 오히려 국립대학교 배구대회에 출전해 손가락 2개를 골절되는 부상이 있었다. 내미는 손에는 수술자국이 보였으나 “지금은 문제없다”며 손가락을 오므렸다가 펴 보였다.

거제 출신의 조 부회장이 배구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72년 거제 성포중 1년 때의 일이다. 1974년 3학년 때 182cm의 큰 키가 돋보였는지 김형필 동명고 감독의 눈에 띄어 진주 동명고로 전학을 오게 된다.

김형태와 함께 콤비를 이뤘던 그는 고교시절 배구 전성기를 누리지만 선수보다는 지도자의 인생역정을 꾸려 나갔다.

현재 그는 경남배구협회 부회장, 진주시배구협회 부회장 겸 전무를 맡고 있다.

“김택세 진주시배구협회장이 물심양면으로 신경을 많이 써 주어 큰 불편 없이 업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화려한 직책에도 불구하고 정기적인 급여를 받고 있지 않다. 순전히 개인 사업을 하며 봉사하는 심정으로 경남배구협회와 진주시배구협회 일을 도맡아 하고 있다.

“배구에 대한 끊을 수 없는 애정 때문이지요. 운명 같은 것이라 할까요. 다행히 제가 하는 작은 가게가 스포츠와 관련된 일이다 보니 주변에서 많이 도와주고 있습니다.”

조 부회장은 큰 체구에 걸맞게 호탕한 성격이었으며 밝고 긍정적이었다.

그는 “24일 막을 내린 경남도민체전에서 진주시가 배구종목에서 종합우승을 했다”며 뿌듯해 하는 모습이었다. 도민체전에서 진주시 배구는 동명고가 거제대표를 눌러 우승했고, 선명여고가 통영대표를 눌러 우승했다. 경남과기대는 창원 LG전자에 패해 준우승했으나 종합점수에서 높아 진주시가 우승하는 영예를 안았다.

“현재 진주의 배구는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습니다. 선명여고의 경우 국가대표뿐만 아니라 청소년 대표가 줄줄이 배출되고 있고, 동명고도 하종화 감독이 다시 온 뒤 전국대회에서 우승을 했으며, 경남과기대 배구부도 올해 지명선수 중 1순위 선수를 데려오는 등 활력소를 되찾았습니다.”

조 부회장은 “전국에서 진주처럼 배구인이 단결이 잘되고 좋은 성적을 내는 도시는 없다”며 “앞으로 이 상태를 조금씩 끌어올려 가며 배구인의 화합과 단결을 도모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마지막에 자신을 거쳐 간 제자들의 이름을 줄줄 꿰며 후배들에 대한 고마움을 전했다. 김양수 황현주 하종화 윤종일 이서기 강용래 김인석…, 김애숙 성은숙 박지원 박경주 김경남….

또 지도자 시절, 동명고와 선명여고가 전국대회에서 우승했을 때 함께 감격의 눈물을 흘렸던 사람들을 기억해 냈다. 강경종 이사장, 박유정 회장, 김형필 감독, 신갑용 교장, 윤남철 교장, 황성규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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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부회장이 지도자로 활약할 당시 선명여고가 전국체전에서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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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동명고 선수들과 함께.(왼쪽이 조 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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