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 (168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 (168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07.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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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장. 1. 오고 있다
왜구가 말 그대로 미친개같이 날뛰고 있었지만 조선의 대기는 청명했다.

찬 기운 물러가고 새봄이 오면, 상돌 같은 백정들이 살고 있는 섭천의 길가에 서 있는 커다란 이팝나무에도 하얀 꽃이 미칠 듯 흐드러지게 피어날 것이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보랏빛 열매가 그리도 탐스럽던 나무였다.

전쟁 중이라 일도 별로 없는 도축장에서 돌아온 상돌은, 혼자 초라하고 좁은 방에 앉아 살을 발라낸 뼈처럼 앙상한 무화과나무 그림자가 드리워진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꽃을 피워 스스로를 뽐내지 않고도 달디단 열매를 맺는 저 나무는 전설의 나무다.’

얼마 전에 세상을 하직한, 상돌이 친부같이 믿고 의지하던 늙은 백정 만복에게서 그 이야기를 들은 후로, 상돌은 무화과나무를 볼 때면 가슴 한 구석이 그지없이 찡했다. 대단한 나무구나 싶기도 하고, 참 불쌍하다는 느낌도 들었다.

‘무화과나무는 전생에 숨어 살거나, 우리 백정들처럼 한 곳에서만 지내야 했던 사람이 죽어 환생한 것은 아닐까?’

물론 상돌이 볼 때에는 꽃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게 피어 있어 그런 말이 나온 것 같았다. 그러자 사람들, 특히 양반들을 잘도 피해 다니는 아내 ‘무이’가 생각났다. 말린 무화과 열매를 좋아하는 상돌과는 달리 날로 먹기를 잘하는 무이. 지금은 또 어느 곳을 헤매고 있는지 모르겠다. 난리통인데도 어디 가서 먹을 것, 입을 것을 용케도 구해오는 여자였다. 바로 상돌의 부모 묘지가 있었던 야산에서 조운을 증인으로 찬물 한 그릇 없이 혼례를 치렀던 그 백정 처녀였다.

‘조운 형님은 어떻게 지내고 계시는지 모르겠다. 아무 일도 없어야 할 텐데.’

지금 같은 전시상황에서는 사람 사는 집보다 짐승을 가두어 두는 우리만큼이나 초라한 빈민촌인 여기가 더 안전할 것도 같았다. 되지도 않을 이런 생각도 해보았다.

‘차라리 이곳에 와서 그 일을 할 수 있으면 더 좋을 텐데.’

그러자 지금은 그 비차라는 게 얼마만큼 만들어졌을까 하는 궁금증과 함께, 둘이서 충청도에 살고 있는 윤달규를 찾아가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산적 소굴에 끌려갔던 일을 생각하니 목이 탔다. 아니, 요즘은 신체보다도 마음이 더욱 갈증을 못 이겨 했다.

전라도를 벗어나 당도한 곳이 안주거리 맛이 기똥찬 술청거리였다. 주막 문간에는 큼직한 좌판이 놓였고, 그 위에 소머리, 돼지 족발 같은 것을 푹 삶아서 얹어놓았다. 그래서 길손들 군침을 감돌게 하였고, 술청 저 안쪽의 시뻘건 화덕에서는 안주를 굽는 냄새가 사람들 발길을 휘어잡아 술 서너 잔 정도는 거덜나게 할 곳이었다.

“세상에 술 냄새가 왜 이리 좋은가, 동생?”

조운이 ‘큼큼’ 하고 코를 벌름거리며 말했다. 긴장감을 풀어보려는 모습이 엿보였다. 상돌도 의도적으로 흰소리를 보태었다.

“여자 냄새가 더 좋지요, 형님.”

그들은 주막 마당에 놓인 평상으로 갔다. 대나무평상이었다. 대숲에서 처음 만났던 둘 다 감회에 젖는 얼굴이 되었다. 머리를 뭉게구름같이 한껏 부풀어 올린 주모가 눈웃음을 살살 치며 다가오던 일이 바로 엊그제 같았다. 그러나 지금은 술은커녕 물 한 방울도 귀한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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