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세지감 (隔世之感)
격세지감 (隔世之感)
  • 경남일보
  • 승인 2014.08.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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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동섭 (진주향교 사무국장)
고려 말의 성리학자로서 충신은 불사이군(忠臣不事二君)이라며 조선개국에 동참치 않고 절의를 지킨 야은 길재(冶隱 吉再) 선생은 멸망한 고려 송도를 돌아보고 시 한수를 남겼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청구영언에 실려 전해오는 이 시조는 태평성대했던 고려시대를 일장춘몽인 듯 회상하며 격세지감을 노래했다.

오늘날 젊은 세대들은 불과 50여 년 전의 이야기를 해도 우리와는 상관없는 전혀 딴 세상 이야기인 줄 안다. 변해도 너무 변해버린 현실을, 60∼70대 이상의 노인세대들은 정말 격세지감을 느끼며 때론 허탈감에, 때로는 좋은 세상을 만났다고도 한다.

농경사회가 주류를 이루었던 1950년대만 해도 삼복의 지금쯤이면 폭염의 뙤약볕에서 논매기가 한창이었다. 세벌논매기를 할 때는 펄펄 끓는 무논에서 웃자란 벼가 목이며 팔에 상처를 내기 일쑤였고, 그 상처로 가렵고 쓰린 고통도 으레 잘 견뎌 냈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던 그 시절, 더위를 쫓는 유일한 도구는 오직 부채가 전부였다.

농촌동네에는 온 마을에 라디오가 1대 뿐이었는데, 밤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그 신기한 라디오 앞에 모여 밤늦은 줄 모르고 듣곤 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했지만 그래도 인심만은 넉넉해 제삿밥, 생일밥은 온 동네 사람들이 나눠 먹었다. 아무개 집 아들이 중학교, 고등학교 시험이 되면 온 동네가 막걸리 잔을 나누며 나의 일인 듯 기뻐했고, 아무개 어른이 돌아가시면 온 동네가 열 일 제쳐놓고 이틀이고 사흘이고 장례준비에 힘을 모았다. 참 인정 많고 살맛나던 세상이었다.

오늘날 GNP가 2만5000 달러에 육박한다고 한다. 손으로 하는 모내기나 논매기는 꿈속의 단어이고 모두 기계화 되었으며, 에어컨에 선풍기에 밀려 부채는 그 모습이 사라져 간다. 스마트폰 하나면 TV, 녹음기, 카메라 모두가 해결되고, 배고픈 사람 없고 너무 잘 먹어 살빼기에 돈을 쓰는 천국 같은 세상에 살면서 인심은 왜 야박해질까?

먹을 것이 없던 시절, 동네 청년들은 밤이면 모여 남의 수박이며 닭이며 서리를 하여 재미있어 했던 시절. 모두가 누가 한 짓인 줄 다 알면서 모른 체 눈감아주고 이해했던 후덕한 인심. 2000년대를 살면서 그때가 아련히 그리운 것은 격세지감일까.

야은 선생은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네”라고 하였건만, 아! 산천은 의구하되 인심은 간데없네, 어즈버 50년대가 꿈이런가 하노라.
심동섭 (진주향교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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