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흥길 교수의 경제이야기
김흥길 교수의 경제이야기
  • 경남일보
  • 승인 2014.09.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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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카―콜라를 대중화시킨 에이서 캔들러
“지구의 3분의 2는 물로 덮여 있고, 그 나머지는 코카-콜라로 덮여 있다” - 이 우스갯소리는 세계 200여국에서 하루 평균 6억 6백만 병, 잔으로는 하루 10억 잔 이상이 팔리고 있어서 세계적인 음료의 대명사에 어울릴 법하다. 코카-콜라가 처음으로 세상에 나온 시기는 1886년이다. 코카-콜라 개발자인 존 펨버튼(John S. Pemberton :1831~1888)은 조지아(Georgia)주 녹스빌(Knoxville)에서 태어나 정식으로 의·약학 교육을 받진 않았지만 여러 가지 재료를 혼합해 약품을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그는 1870년 애틀랜타에 와서 약국을 운영하기 시작했고 각종 조제약으로 명성을 얻었다. 1886년 존 펨버튼은 프랭크 로빈슨(Frank Robinson)과 함께 펨버튼 화학회사를 설립했고, 애틀랜타의 주류 판매 금지조치에 발맞춰 술을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음료인 코카-콜라를 개발하여 판매하기 시작한다. 존 펨버튼은 국부마취제로 쓰이던 코카(Coca) 잎의 추출물, 콜라(Kola)나무 열매 그리고 시럽 등을 혼합하여 새로운 음료를 개발했던 것이다. 이 음료는 약국 소다수 판매대에 진열되어 한 잔당 5센트로 판매되었지만, 코카-콜라는 하루 평균 6잔이 판매되었고 첫 해 매출은 50달러에 불과했다. 그런데 광고비용 73달러60센트나 들어갔다. 펨버튼의 사업가적 재능은 부족했던 탓인지 이 음료의 판로개척이나 마케팅에 성공하지 못하자, 그가 1888년에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여러 파트너들에게 사업지분을 쪼개 팔았는데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이 바로 에이서 캔들러(Asa Griggs Candler)였다.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었지만 탁월한 사업 감각을 지녔던 캔들러는 1887년에 코카-콜라 사업의 소유권을 확보했다.

에이서 캔들러는 1851년 조지아 주 빌라 리카(Villa Rica)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북전쟁 탓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그의 직업적 생애는 약국 주인으로 특허 받은 약을 제조하는 사람으로 시작하였다. 1887년 코카-콜라 발명가인 존 팸퍼턴(John Pemberton)과 몇몇 공동 출자자들에게 2천 3백 달러를 지불하고 콜라 제조 비법을 사들이게 된다. 캔들러는 펨버튼의 전 동업자였던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1892년에 ‘코카-콜라 컴퍼니(The Coca-Cola Company, TCCC)’를 설립하게 된다. 코카-콜라의 성공은 전적으로 캔들러의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 덕분이었다. 캔들러는 광고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투자하였는데, 수익금의 4분의 1가량을 광고비로 사용하였다. 대대적인 광고마케팅을 펼친 캔들러는 1914년까지 5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아울러 캔들러는 1893년에 코카-콜라 상표권을 미국 특허청에 등록하여 브랜드를 보호하고자 했다.

캔들러는 초창기에 코카-콜라를 팔아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중앙은행과 신용보증회사를 설립하였고, 부동산에도 투자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된다. 캔들러는 그렇게 번 돈으로 가장 많은 헌금을 하는 독실한 감리교 신앙인이면서 또 기부를 많이 하는 자선가가 되었다. 그는 당시 감리교 신학대학이었던 에머리대학이 옥스퍼드와 조지아에서 애틀랜타로 이주 할 수 있도록 1 백만 달러와 부지를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에머리 대학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1906년에는 애틀랜타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캔들러 빌딩을 완성하였고, 1912년에는 뉴욕에 캔들러 빌딩이 준공되었다. 캔들러는 1916년에 애틀랜타 시장에 선출되고 코카콜라에 대한 일상적 관리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는 시장으로서 1917년 1500채의 가옥을 태워버린 시카고 대화재 이후에 시의 재정과 도시 재건축을 두고 적절한 조화를 잘 이루어내는 성공적인 시정을 펼쳤다. 1919년까지 시장으로 재임하다 물러나서는 코카콜라 사의 모든 전권을 그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는데 후에 어네스트 우드러프(Ernest Woodruff)가 이끄는 투자집단에게 매각을 하게 된다. 매각 대금은 자그마치 2,500만 달러였다. 캔들러가 매입한 제조비법 대가에 견주면 투자 수익률은 1만%를 넘는 것이었다. 1922년에는 캔들러 파크 조성을 위해서 애틀랜타 시에 2십만 평방미터의 부지를 기증하였다. 192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1929년 3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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