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카―콜라를 대중화시킨 에이서 캔들러
에이서 캔들러는 1851년 조지아 주 빌라 리카(Villa Rica)에서 태어났다. 그는 남북전쟁 탓에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지만, 그의 직업적 생애는 약국 주인으로 특허 받은 약을 제조하는 사람으로 시작하였다. 1887년 코카-콜라 발명가인 존 팸퍼턴(John Pemberton)과 몇몇 공동 출자자들에게 2천 3백 달러를 지불하고 콜라 제조 비법을 사들이게 된다. 캔들러는 펨버튼의 전 동업자였던 프랭크 로빈슨과 함께 1892년에 ‘코카-콜라 컴퍼니(The Coca-Cola Company, TCCC)’를 설립하게 된다. 코카-콜라의 성공은 전적으로 캔들러의 공격적인 마케팅 활동 덕분이었다. 캔들러는 광고에 엄청난 액수의 돈을 투자하였는데, 수익금의 4분의 1가량을 광고비로 사용하였다. 대대적인 광고마케팅을 펼친 캔들러는 1914년까지 500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아울러 캔들러는 1893년에 코카-콜라 상표권을 미국 특허청에 등록하여 브랜드를 보호하고자 했다.
캔들러는 초창기에 코카-콜라를 팔아 수백만 달러를 벌어들이면서 중앙은행과 신용보증회사를 설립하였고, 부동산에도 투자하여 많은 돈을 벌어들이게 된다. 캔들러는 그렇게 번 돈으로 가장 많은 헌금을 하는 독실한 감리교 신앙인이면서 또 기부를 많이 하는 자선가가 되었다. 그는 당시 감리교 신학대학이었던 에머리대학이 옥스퍼드와 조지아에서 애틀랜타로 이주 할 수 있도록 1 백만 달러와 부지를 기부하였을 뿐만 아니라, 에머리 대학 병원을 설립할 수 있도록 수백만 달러를 기부하였다. 1906년에는 애틀랜타에서 가장 높은 빌딩인 캔들러 빌딩을 완성하였고, 1912년에는 뉴욕에 캔들러 빌딩이 준공되었다. 캔들러는 1916년에 애틀랜타 시장에 선출되고 코카콜라에 대한 일상적 관리에서 손을 떼게 된다. 그는 시장으로서 1917년 1500채의 가옥을 태워버린 시카고 대화재 이후에 시의 재정과 도시 재건축을 두고 적절한 조화를 잘 이루어내는 성공적인 시정을 펼쳤다. 1919년까지 시장으로 재임하다 물러나서는 코카콜라 사의 모든 전권을 그 자식들에게 물려주었는데 후에 어네스트 우드러프(Ernest Woodruff)가 이끄는 투자집단에게 매각을 하게 된다. 매각 대금은 자그마치 2,500만 달러였다. 캔들러가 매입한 제조비법 대가에 견주면 투자 수익률은 1만%를 넘는 것이었다. 1922년에는 캔들러 파크 조성을 위해서 애틀랜타 시에 2십만 평방미터의 부지를 기증하였다. 192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졌다가 1929년 3월 12일에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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