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장’의 자격
‘완장’의 자격
  • 경남일보
  • 승인 2014.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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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준 (동명고등학교 교감)
2012년 2월 24일 새벽 맨체스터의 올드 트래퍼드 경기장. 맨유와 아약스의 경기에서 캡틴 박지성이 왼팔에 노란 완장을 차고 나왔을 때의 그 감격을 잊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상가에 조문을 가서 상주의 팔에 두른 두 줄 그어진 상장(喪章)을 볼 때면, 고애자(孤哀子)의 불효에 대한 회한과 망자에 대한 그리움이 묻어 있는 것 같기에 분향소 공간은 숙연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완장’은 주위 사람들을 크게 위압하거나 불편하게 만드는 부정적 이미지가 크다.

언젠가 개인적인 자리에서 받은 명함을 보고 나오는 실소를 금치 못한 적이 있었는데, 그 명함의 주인은 시골 한 초등학교 총동창회의 사무총장이셨고, 다른 분은 대외부총장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친목단체의 직함이 인플레되었다고는 하지만 이건 심해도 너무 심한 것 같고, 우리 사회의 완장문화의 단면을 보는 것 같아 더 씁쓸했었다.

완장(腕章)은 ‘자격이나 지위 등을 나타내기 위하여 천이나 비닐로 만들어 팔에 두르는 띠’이다. 예전엔 공사 현장이나 공원의 출입구, 대중이 모인 곳에는 으레 완장을 찬 사람들이 있었고, 군문(軍門)의 헌병과 주번사관 등이 완장을 찼었는데, 그들은 대부분 타인을 통제하는 사람이었기에 그들이 좋게 보일 리 없었을 것이고, 지금은 대부분 없어졌지만 학교에서도 ‘주번’이나 ‘선도위원’이 ‘완장’을 차고 동료들을 지도하기도 했었는데, 그들의 위세는 참으로 컸었다.

이 ‘완장’은 오랫동안 우리 사회에서 ‘권력’의 상징이었다. 30년 전 작가 윤흥길이 쓴 소설 ‘완장’의 주인공 임종술이 대표적인 사람이다. 임종술은 그야말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인물로 성격마저 난폭하고 객지에서의 삶을 실패하고 귀향해 곡절 끝에 마을 저수지 관리인이 된다. 그는 난생 처음 얻은 이 권한을 최대한 활용하기 위해 그럴듯한 완장을 만들어 팔에 차고 다니며 권력(?)을 행사했지만 그 종말은 허망하기 그지없었다.

근자에 대리기사 집단폭행 사건으로 나라가 시끄럽다. 평소 너그러운 우리의 술문화대로라면 세월호 유가족 대표들의 그날 행동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내가 누군지 알아?’로 상징되는 특권의식, 요즘 말로 ‘갑(甲)질’ 대신 “죄송합니다. 자식 잃고 요즘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술 한 잔 하다 보니 감정이 격했습니다. 피해자께 죄송하고 국민들께 실망시켜드려 민망합니다”라고만 했더라면. 그리고 사건의 중심에 있는 국회의원께서도 “못 봤다, 기억이 없다”는 말 대신 “괴로워하는 그분들을 위로한다고 몇 잔 했습니다. 적절치 못한 행동이었습니다”라고만 했더라면.

‘화무십일홍, 달도 차면 기우는 법’, 권력의 무상함은 고금 역사를 통해 잘 알지 않는가. ‘완장’은 누구나 차고 싶어 하지만 주제넘은 사람이 찼던 결과 또한 허망했다. 소설 ‘완장’에서 임종술이 떠난 뒤 그가 찼던 완장이 저수지에 떠다닌 것처럼. 아! 권한을 행사하기보다 자신을 낮추고 봉사하는 완장 주인은 우리들에게 언제쯤 나타날까?
김형준 (동명고등학교 교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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