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 (231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 (231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10.21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6장 2. 메아리 없는 절규
“지금은 운명을 이야기할 때가 아니지 않소? 집안 어르신들도 아시게 되면 여간 충격이 크지 않고 심려가 대단하실 것이니, 강형께서 제발 정신을 차리셔야 하오, 제발.”

천왕봉에 눈사태가 나서 그곳까지 눈 더미가 밀려 내려오면 그 밑에 깔려 죽어버리고 싶은 정평구였다.

“으, 크, 흐…….”

눈병에 걸린 사람처럼 두 눈알이 벌게진 채로 알아들을 수 없는 짐승소리 같은 이상한 소리를 내는 조운에게서 차라리 달아나고 싶다는 충동을 간신히 억누르며 정평구는 계속 말했다.

“지금은 전쟁 때란 말이오, 전쟁.”

“누가 그걸 모릅니까?”

이번에는 아까와는 반대 방향에서 세게 불어 닥치는 흙바람이었다. 그만 눈에 흙먼지가 들어갔는지 손등으로 눈을 싹싹 비비며 정평구는 확실히 인식시켜 주려는 듯,

“그리고 어떻게 구한 의원인데……?”

조운은 그만 입을 다물었다. 그건 그랬다. 그때 그 고을 안에서는 의원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 지리산 쪽 시골에 있는, 삼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받은 그 한의를 정말 어렵사리 찾아내었다. 그러고는 둘님과 상돌은 그 한의원에 맡겨두고, 그들 두 사람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것이다.

“나를 모질고 독한 인간이라고 욕해도 할 수 없소. 난, 돌아가서 손상된 비차를 수리하여 본래대로 완성시켜야 하오. 이건…… 한 개인이나 가정보다 큰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정평구가 그런 말을 할 때만 해도 조운은 돌아와서 비차를 복구할 생각이 없었다. 그의 마음은 오직 아내와 유산된 아이, 그리고 불구의 몸이 돼버린 상돌에게만 가 있었다. 그 밖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모든 게 귀찮고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차라리 왜군의 신식무기라는 조총에 맞아 죽고 싶었다. 그런데 그의 마음을 돌려놓은 사람들이, 그보다 더 큰 불행을 맞은 둘님과 상돌이었다.

“돌아가세요. 돌아가서 그 일을 하셔야 해요.”

둘님은 실의와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을 하면서도 그렇게 말했다. 조운이 여태 볼 수 없었던 또 다른 둘님의 한 면모였다.

“형님! 제가 무엇 때문에, 누굴 위해서, 내 다리 하나를 희생시킨 것입니까? 정말 형님에 대한 실망이 큽니다. 형님이 그렇게 옹졸하고 사적인 것에만 매달리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저는 형님과 의형제를 맺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상돌 또한 더 썩어 들어가지 않도록 다리에 엄청나게 큰 침을 꽂은 몸을 하고서도 그렇게 말했다.

“아, 지금 저 사람이 하는 말…….”

그런 백정 모습에 정평구와 한의도 여간 놀라는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결국 조운은 아내와 동생을 그대로 둔 채 돌아올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시작일 뿐이었다. 조운은 몰랐다, 정말 몰랐다. 그건 비극과 시련의 첫걸음에 불과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도대체 악마는 사람을 더 얼마나 고통과 실의에 빠뜨리고 나서야, 그 독기 가득 찬 숨결을 거두어들일 속셈인 것일까?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 경상남도 진주시 남강로 1065 경남일보사
  • 대표전화 : 055-751-1000
  • 팩스 : 055-757-1722
  • 법인명 : (주)경남일보
  • 제호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 등록번호 : 경남 가 00004
  • 등록일 : 1989-11-17
  • 발행일 : 1989-11-17
  • 발행인 : 고영진
  • 편집인 : 강동현
  • 고충처리인 : 최창민
  • 청소년보호책임자 : 김지원
  • 인터넷신문등록번호 : 경남, 아02576
  • 등록일자 : 2022년 12월13일
  • 발행·편집 : 고영진
  •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모든 콘텐츠(영상,기사, 사진)는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은바, 무단 전재와 복사, 배포 등을 금합니다.
  • Copyright © 2024 경남일보 - 우리나라 최초의 지역신문. All rights reserved. mail to gnnews@gnnews.co.kr
ND소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