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262회)
[김동민 연재소설] 진주성 비차(262회)
  • 경남일보
  • 승인 2014.12.0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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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장 2. 영웅, 외로운 자화상
시민은 허리에 찬 칼집을 거머쥐며 폐부 깊숙이 심호흡을 했다.

‘예로부터 참으로 축복받은 이 나라 강토인 것을.’

왜군이 미친개같이 설치고 다니며 노략질을 하고 있기는 해도, 아직은 여전히 숨을 쉴 만한 조선 땅 유서 깊은 남방 고을의 공기였다. 시민은 아주 잠깐 고향 충청도 목천현 잣밭마을을 떠올렸다. 가지가 길찍길찍하게 하늘로 뻗어 오른 푸르고 튼실한 잣나무들은 지금도 잘 지내고 있겠지.

‘아, 내일이면 시월하고도 중순으로 접어드는구나. 덧없고 무정한 것이 세월이라지만, 이제껏 버텨준 시간들이 고맙기만 하도다.“

시민의 눈에 10월(음력) 초순의 끝자락이 조선 여인네 치맛자락같이 보이는 듯했다. 그런 한편으로 일본민족의 섬나라 오랑캐 기질과 근성을 여실히 보여주는 날이기도 했다. 부하가 와서 어둠같이 컴컴한 목소리로 고했다.

”놈들이 다시 움직이고 있습니다. 어떡할까요?“

시민은 뇌리에 자꾸 자라는 잣나무를 싹둑 자르는 듯한 어투로,

”좀 더 추이를 지켜본 후에 명령을 내리겠으니 그렇게 알라.“

왜군은 자정이 좀 지난 4경 초부터 행동을 개시했다. 막사마다 훤히 불을 밝혔다. 성 주변은 삽시간에 불야성을 이루었다. 지상의 불빛에 천상의 별들이 빛을 잃는 듯했다. 그 ’불의 세상‘에 사람도 불의 일부분이 돼버릴 것 같았다.

”왜놈들 모두 총동원시킨 모양이야. 잘됐지 뭐야.“

”하나씩 처치하려니 귀찮은 참에 몰살시킬 기회잖아?“

”야광귀(夜光鬼) 같은 것들!“

실제로 키가 퍽 작은데다가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간혹 눈알이 튀어 나온 듯한 삐뚜름한 얼굴은 야광귀를 방불케 했다. 굳이 생김새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남의 나라를 약탈하기 위해 침입한 왜군은, 정월 초하룻날 밤에 하늘에서 사람이 사는 집으로 몰래 내려와 신발을 훔쳐가는 귀신과 다를 바 없는 것들이기도 했다.

”어디 체 없어?“

”맞아. 성벽에 체를 걸어두자고.“

수성군들 사이에 조선 세시풍속에 대한 이야기도 나왔다. 야광귀가 신발을 가져가면 잃어버린 사람은 일년 내내 불길하므로, 벽에 체를 걸어두어 야광귀가 체에 뚫린 촘촘한 구멍을 세다가 ’꼬끼오!‘ 하고 새벽닭이 우는 소리에, 그만 신발 훔쳐가는 것을 깜빡 잊어버리고 얼른 달아나도록 한다는…….

어쨌든 조선군이 조금도 경계를 늦추지 않고 똑똑히 지켜보는 사이에도 무수한 왜군 그림자들은 어지럽게 오갔다. 짐바리를 실은 우마차가 득시글거렸다. 한밤중에 갑자기 끌려나온 소와 말들이, ’음-매‘, ’히히힝!‘ 하고 내지르는 소리들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성가퀴에 몸을 감추고 그 모든 광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크게 부릅뜬 눈으로 노려보고 있는 수성군이 소리 죽여 또 소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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