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다리野] 민족 애환 서린 섬진교
[아이고 다리野] 민족 애환 서린 섬진교
  • 최두열
  • 승인 2014.10.28 16: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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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영·호남 연결한 최초의 다리
1933년 섬진교 설계도




1935년 이전 섬진강을 건너기 위해서는 뱃길을 이용하거나 보다 먼 거리를 돌아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영남과 호남 간의 물류를 이동하고 연락의 편의성을 증대시킬 필요가 있었으나 교량이 없어 큰 불편을 겪었다. 이에 조선총독부가 총공사비 29만원의 근대식 교량건설을 계획하고 1933년 10월 경남토목과 감독 아래 교량가설 공사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약 2년 후인 1935년 7월께 계획보다 6만원이 더 소요된 총공사비 35만원, 교량길이 360m로 완공된 것이 하동군 광평리와 전남 광양시 다암면을 연결하는 영·호남 최초의 다리 ‘섬진교’다.

그러나 2년 간의 공사과정에서 심심찮은 사건·사고로 얼룩지기도 했다. ‘동아일보’에 따르면 1934년 6월 공사 중 감전된 노동자가 다리 밑으로 떨어지는 것을 붙잡기 위해 손을 뻗은 또 다른 노동자까지 2명의 인부가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4개월 후에는 다리에서 작업을 하던 인부가 실족해 강에 빠졌으나 결국 헤어나오지 못한 채 사망했다. 당시 공사과정에서 노동자들에 대한 안전의식이 얼마나 없었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사건들이었다. .

이뿐만 아니라 1935년 5월에는 50여명의 근로자 임금이 체불돼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기도 했다. 노동자들은 오전 7시부터 오후 7시까지 12시간의 고된 일을 하며 40~50전의 전표 한 장씩을 받아 돈과 바꿨으나 공사사무소 측에서 환전을 계속 미루면서 노동자들이 단체로 파업을 하게 된 것이었다.

강점기 시절 일제는 토지조사 사업, 화폐정리 사업 등으로 우리 국민들의 땅과 돈을 빼앗았고, 심지어 노동에 대한 정당한 대가도 지불하지 않아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국민들의 생활마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이렇게 국민들의 피땀으로 건설한 섬진교는 당초 목적보다 1920년대부터 일제에 의해 실행된 ‘산미증식계획’에 따른 식량이동에 주로 이용됐다. 당시 식량난에 허덕이던 일본 본토의 부족한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호남 곡창지대의 쌀을 부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유출했기 때문이다.



 
1935년 완공된 섬진교 밑을 당시 돛단배가 지나고 있다.


한국전쟁때 파괴된 후 1960년에 복구

남해대교 건설은 지역경제 발전 견인차

현재 1986년 완공된 ‘신 섬진교’만 존재

섬진대교·남도대교 등 건설…역할 감소



광복 이후 섬진교는 영남과 호남의 연결고리 역할을 해왔지만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인 7월 25일 당시 하동읍 서기 김상식씨가 국군을 파죽지세로 밀어붙인 북한군의 남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다이너마이트로, 그리고 공군에 의한 추가 폭탄투하로 다리 중앙부 약 10m가 파괴돼 다리로서의 수명이 끝나는 듯했다.

하지만 10년 후 1960년 2월 당시 정부가 사업비 2억원을 들인 복구공사를 통해 다시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한동안 하동군과 연결된 다리는 섬진교가 유일했으나 박정희 정부가 들어서면서 새로운 다리가 건설됐는데, 그것이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를 연결하는 길이 660m의 남해대교다. 다리는 1968년 착공돼 약 5년 후인 1973년 6월께 완공됐다. 당시 국내자본 9억 9500만원, 외국자본 218만 6000달러 등 총 18억 7000만원의 공사비가 투입된 국내 최초의 현수교였다.

남해대교의 완공으로 차량을 이용해 손쉽게 남해를 방문할 수 있게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그와 연결된 하동군을 통과하는 교통량 또한 비약적으로 증가했으며, 이와 더불어 지역경제 또한 한층 발전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당시 섬진교는 편도, 즉 한 방향으로의 통행만 가능해 늘어난 교통량을 감당하지 못했다. 이에 인근에 (주)한양이 길이 420m, 폭 15.5m의 현재의 섬진교를 새로 건설하게 됐다.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까지 민족의 비운의 역사와 함께한 ‘구 섬진교’와 발전된 ‘신 섬진교’가 공존하게 됐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구 섬진교’의 존치를 두고 관리문제에 대한 하동군과 광양군이 서로 이견을 좁히지 못해 결국 철거하기로 결정해 지금은 1986년 완공된 ‘신 섬진교’만 존재하게 됐다. 1990년대 이후 추가로 하동군과 광양시 소재 포스코 광양제철소를 연결하는 길이 700.4m, 높이 15m의 섬진대교가 1995년 새로 건설됐다.



 
1968년 섬진교 모습


그리고 2003년 영남과 호남의 교류증진과 지역민의 생활편의, 관광 활성화를 위해 화개장터 인근에 길이 358.8m, 높이 15m 아치형 ‘남도대교’가 추가로 건설됐다.

두 교량의 추가 건설과 함께 하루 평균 3800∼3900대의 교통량을 기록함으로써 섬진교는 과거 이용자들이 점점 줄어들어 현재의 교통량은 하루평균 900여대에 불과할 정도로 다리로서의 역할이 감소했다.

현재 섬진교를 중심으로 2011년부터 하동군과 광양시의 연계사업으로 영·호남을 아우르는 ‘섬진강 100리 테마로드’ 조성사업이 진행 중이다. 현재 광양시 쪽의 ‘자전거 테마로드’는 이미 완공돼 주말이면 많은 자전거 동호인이 즐겨 찾고 있다.

하동군 쪽의 ‘보행 테마로드’는 현재 95% 이상의 공정률을 보이며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어 하동을 찾는 관광객에게 새로운 즐길거리를 제공하는 것은 물론 증가된 교통량으로 과거의 명성을 조금이나마 되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

구 섬진교가 철거되기 전부터 하동읍에 살고 있는 한 주민은 “근대 한국역사의 아픔을 함께해 온 ‘구 섬진교’를 유지·보수해 ‘섬진강 테마로드’와 연계했더라면 자손들이 나라 잃은 슬픔, 그리고 민족분열의 아픔을 되풀이하지 않는 좋은 본보기가 돼 하동을 찾는 이들에게 더 뜻 깊은 볼거리를 제공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표했다.


최두열기자 hadong8050@gnnews.co.kr



 
2014년 10월 현재의 섬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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