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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위식의 발길 닿는대로 (61) 함벽루와 연호사황강에 누운 암벽…화룡점정인듯 눈부신 청빛 기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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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2.04  03:3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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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와 연호사 원경
 


진주에서 출발하면 홍류동 계곡이 좋고 해인사가 좋고 매화산이 좋고 가야산이 좋아서 합천 들머리인 황강을 가로지른 제2남정교를 지날 때마다 차창 밖으로 바라만 보면서 늘 지나치기만 했던 그림 같은 풍광이 언제나 짠했던 함벽루를 찾아서 낙엽 지는 가을 길을 홀로 나섰다.

중부내륙을 종단하는 33번 국도는 삼가면 말고는 새로운 4차선 도로가 잘 닦여서 합천 나들목으로 차를 내리면 드넓은 백사장의 황강과 맞닥뜨려진다. 강 건너 빤하게 건너다보이는 홀로 떨어진 야트막한 산이 마치 황소가 머리를 숙여 강물을 먹고 있는 형상이라서 황우산으로 불렀는데, 석벽을 등진 벼랑 아래로 빨간 주칠의 함벽루가 단풍이 곱게 물든 수림 사이의 천년고찰 연호사와 나란하게 오색단풍과 어우러진 그림자를 강물에 지우고 그림같이 떠 있다.

합벽루를 곧장 가려면 합천으로 들어서는 제2정남교를 건너 우회를 하여야 하지만 건너다보이는 풍광이 너무 좋아 강변 백사장으로 내려섰다. 강섶은 운동시설로 정비되어 있는데 드넓은 백사장은 흙먼지 한 점 없는 말 그대로 빛깔고운 은모래다. 맨발로 뜀박질이라도 해보고 싶은 충동이 절로 나고 알이 굵은 모래가 발가락 사이를 까끌까끌 비집고 올라오는 듯 발바닥이 스멀거리는데 모래톱을 만들며 흐르는 강물도 함벽루의 절경에 취해 예서는 잠시 흐름을 멈춘 듯이 거울같이 맑다.

황강물이 맑아서 백사장이 고운데 깎아지른 벼랑에는 함벽루가 날 듯하고 기암절벽 틈새에는 연호사가 앉았는데 암벽의 틈새와 절묘한 조화는 풍광의 운치가 황홀경을 자아내고 신라의 화랑 죽죽의 충절은 대야성 솔숲 되어 만고상청 푸르렀고 황우산 단풍은 황강물에 영롱하다.

백사장의 모래톱을 한참을 거닐다가 함벽루를 찾아서 제2남정교인 황강다리를 건너서 표지판의 안내를 따라 황우산을 끼고 우회를 하였더니 이내 석축 위에 단청이 화려한 비각이 우뚝하게 높이 섰다. 비각의 규모와는 달리 안에는 용틀임의 옥개석인 지붕돌도 없고 돌거북도 없이 네모진 돌 기단에 자그마한 말뚝 석비가 세월에 빛이 바래져 윤기조차 잃어서 음각된 비문은 간신히 판독할 정도인데 ‘신라충신 죽죽지비’라는 비명 아래로 비문의 말미엔 ‘진양 강대수 기’라 씌었고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28호라며 642년 신라 선덕여왕 11년에 이곳 대야성에서 백제군과 싸우다 성의 함락과 함께 장렬하게 전사한 신라 화랑 죽죽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인조 22년에 세운 비라는데 애달픈 사연이 안내판에 눈물겹다.

가던 길을 재촉하여 산모롱이를 돌아드니 단청이 고운 근작의 일주문이 우뚝 서서 반기는데 산기슭 언덕배기에는 명종조에 세워진 ‘이증영의유애비’는 극심한 흉년에 백성을 구휼하고 청렴한 관직생활을 칭송한 비문으로 남명 조식 선생께서 짓고 당대의 초서 명필가인 고산 황기로 선생이 쓴 비석으로 경남도유형문화재 367호라는데 이 말고도 줄지어 선 빗돌이 여럿이다. 더듬거리며 해독해 보는 애국과 공덕을 기린 즐비한 송덕비 앞에서 오늘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였다.

이제라도 남들처럼 내 알바 아니라하고 모르고 살면 오죽이나 좋으련만 천리 밖의 소리가 두 귀로 들리고 온갖 짓거리가 눈으로 보이니 타고난 팔자일까. 여의도는 아직도 자신들의 안위만을 위해 제 목소리 한마디 내지르지 못하고 오리반은 ‘꽥꽥’, 참새반은 ‘짹짹’ 하고 하나같은 목소리로 당리당략만을 위한 당쟁과 정쟁이고, 규정에만 목을 매며 밥그릇만 챙기는 천치가 되어버린 천재들인 공직자들이나, 감추고 빼돌리며 딴 주머니 차는 경제인들 하며 내로라하는 그들 앞에서 머리 싸매어 연구하고 팥죽 같은 땀 흘리고 쉴 틈 없이 내달리는 수많은 이들의 삶이 보이기나 하는 건지 탄식만 절로 나니 우리는 과연 송덕비를 하나라도 세울 일이 있을지 참담함이 앞선다.

울울창창한 도토리나무가 가랑잎을 흩날리며 길을 내어주는 돌계단을 내려서자 푸른 강물은 건너편 백사장을 깔고 유유히 흐르는데 기암절벽을 등지고 추녀를 하늘 높이 치받은 함벽루는 창공을 높이 날던 오색찬란한 공작새가 나래를 펼친 채로 이제 막 반석 위에 발을 붙이며 착지하는 모습같이 그 풍채가 고고하고 도도하다.

돌계단을 내려서자 들머리의 추녀 밑에는 ‘함벽루’라는 현판이 붙었고 강물을 내려다보는 정면의 처마 밑에는 ‘제일강산’이라는 흑판백서의 현판이 붙어 있다. 익공다포와 창방 위의 천장 전부는 칠보단장을 한 듯이 화려한 단청이 눈이 부시도록 찬란하다. 누마루에 올라서면 사면의 창방 위와 청황룡이 마주한 대들보에도 한시의 편액들이 빼곡하게 걸렸는데, 남명 선생의 편액과 퇴계 선생의 편액이 들보에서 마주보고 우암 선생의 편액이 창방에서 지켜본다.



 
함벽루
 


남향 난간에 다가서자 햇살이 반사되는 백사장은 눈부시고 정량호의 옛 모습은 찾을 길이 없으나 푸른 물은 깊게 흘러 물결 없이 유유하며 반석의 끝자락에 주춧돌을 받쳤으니 누각의 처마가 강물 위에 비치고 낙수는 영락없이 강물 위로 떨어지니 명월이 있든 없든 명승지요 절경이니 어찌 시인 묵객들이 끊어질 날이 있었으랴.

한때는 합천 들머리인 황강변의 일해공원에서 강변을 따라 걷는 길을 조성하며 함벽루의 낙수가 길바닥으로 떨어졌었는데 다행스럽게도 함벽루 앞에는 길을 걷어내고 나무다리를 설치하여 길을 돌려서 낙숫물이 본래대로 강으로 떨어지게 강변을 다시 복원하였으니 예전만은 못해도 그나마 다행이다.

함벽루가 등을 기댄 수직의 절벽에는 우암 송시열 선생의 글씨라는 ‘함벽루’ 말고는 낯선 이름들이 유난히도 빼곡하게 음각되어 있다. 세월의 흔적은 역력하지만 추앙인지 낯냄인지 알 수는 없으나 도배를 하듯 석벽을 덮었다. 원수의 이름은 모래에 새기고 은인의 이름은 돌에 새기라는데 가슴에 새겨진 이름이라야 만대불후의 불멸이 아닐까. 촉석루보다 앞서고 영남루보다 먼저 섰다는 함벽루와 추녀의 끝이 닿을 듯이 높이만 달리한 연호사는 절벽의 틈새를 정교하게 활용한 아기자기한 짜임새로 자리를 잡았는데 여느 절집과는 판이하게 다른 목조 한옥의 예술적 품위가 고상하고 정겨운 천년고찰이다.

연호사가 강섶을 물고 황우산의 끝자락에 등을 기댄 정상에는 삼국시대 신라의 대야성의 흔적이 남아 경상남도기념물 제133호로 지정된 곳이다. 매봉산 혹은 취적산이라고도 하는 이곳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로서 신라로서는 서부지역의 중요한 요새여서 김춘추의 사위 김품석이 성주로 있었으며, 선덕여왕 11년에 백제의 침공으로 성이 함락되고 성주인 김품석과 그의 부인인 김춘추의 딸 고타소랑도 함께 죽어 전몰한 신라인 2000여명과 함께한 원혼을 달라기 위해 연호사를 세웠다. 이후 무열왕으로 등극한 김춘추의 복수심이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게 된 단초가 되었고 이후로는 후백제가 점령했다가 최종적으로 고려가 점령하는 등 수차례의 뺏고 빼앗기는 피맺힌 원한의 우여곡절로 연호사의 흥망성쇠도 거듭되면서 천오백년의 역사를 함께하며 원혼을 달래 온 왕생기도 도량으로 강물도 쉬어가고 바람도 쉬어가는 그림 같은 절경인데 무릉도원이 여기 같을까 원혼도 쉬고 싶을 극락같은 비경이다.

마루청이 반들거리는 극락전에 들어서 헌향의 예를 갖추니 한낮의 고요는 더욱 정적 속으로 깊어지는데 청아한 풍경소리만 애잔하게 여울진다.


 
신라충신 죽죽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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