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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31)(92)수필가 청계 양태석 화백 이야기(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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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6:5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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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31)

(92)수필가 청계 양태석 화백 이야기(7)

 

수필가 양태석의 ‘풍곡 성재휴의 애주와 해학’ 이야기를 마무리할까 한다. 풍곡 화백이 하루는 종로에서 술을 먹다 보니 차비도 없이 만취해서 종각 앞 버스 정류장까지 왔는데 어느 신사가 술이 되어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김에 “여보 돈 남은 게 있나?” 등을 치며 물었다. 그 사람도 취기에 “그래 있다, 왜?” 풍곡이 “사내가 돈을 남겨서 집으로 가는 사람도 있나. 한 잔 더하고 가는 것이 어떻소?” 하자 그 사람은 풍곡의 아래 위를 훑어 보더니 “그래 좋소.”하고 같이 술집으로 갔다. 두 사람은 술친구가 되었다. 그 사람은 영화계의 거물급 감독으로 술 생각이 나면 만나게 되었다. 전시회 때는 감독은 영화배우들을 몰고 와서 많은 그림을 소개해 주었다.

풍곡은 상복이 많았다. 1960년대에 이미 뉴욕 빌리지 미술관에서 개최한 미술 공모전에서 당당히 금상을 수상하였고 57년 미국 월드화랑 주최 ‘한국현대작가전’에는 주인 부세띠 여사가 직접 내한하여 선정한 작가라는 것이 주목할 만했다. 58년 샌프란시스코 박물관이 주최한 ‘아세아미술전’에 초대된 것이라든지 모두가 타의에 의한 선정이기에 화력이 돋보이는 점이라 할 것이다.

동경과 뉴욕, 워싱턴 등의 초대전을 가졌고 해외에서 눈여겨 보는 사이 국내에서는 오히려 과소평가되고 있었으나 70년대에 비로소 한국미술대상전에 초대를 받게 되었고 73년엔 수도여자사범대학 교수가 되었다. 78년 중앙미술대상 예술상을 수상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미술원로의 대우를 받게 되었다. 제1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장을 역임하였고 사후에는 문화훈장을 받았다.

풍곡은 검약정신이 몸에 배어 있었다. 25년이 지난 양복을 입었고 가죽이 헤어진 구두를 신었고 넥타이는 유행이 돌아와 넓이가 현재의 것과 같았다고 하는 등 몸 치장에 힘을 쓰지 않았다. 주변의 모든 물건이 다 수명이 있다고 하면서 못 쓰게 되기 전에는 버리지 않았다. “하루 술값이면 양복 한 벌 살 수 있는데 왜 옷을 사지 않고 술만 즐기느냐”고 하면 “이 사람아 술이야 음식이니 먹지 않고는 안되지만 옷이야 유행이 지나도 몸만 가리면 되는 것 아닌가.”하고 태연했다.

그림을 그릴 때는 자신에게 엄격하고 점 하나 선 하나 치는 데도 소홀함이 없었다. 자기 그림을 자기가 아끼는 것은 남에게 해가 되는 것이 아니므로 그렇다지만 그림을 남발하는 일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이므로 삼가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풍곡은 약속을 철저히 지키는 편이었다. 후배들 전시장에 초대를 받았을 때는 근처 다실에 나와 1시간여 기다리다가 시간에 맞추어 전시장에 들러 여러 가지 덕담과 개선점들을 챙겨 주었다.

양태석 화백은 “우리 역사에 수많은 기행작가들이 있으나 그분의 행적은 진실을 바탕으로 한 해학적 요소가 많았다는 점이 다른 작가들과 구별되는 점이다.”고 풍곡을 회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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