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원칼럼]갑과 을
[객원칼럼]갑과 을
  • 경남일보
  • 승인 2015.02.11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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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찬열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교수)
갑과 을은 원래 계약서를 쓸 때 계약 당사자를 지칭하는 법률용어이지만 한국에서는 상하관계나 주종관계로 뜻이 왜곡돼 있다. 갑을논란에 불을 붙인 것은 땅콩회항 사건에서 시작해 백화점 주차장 사건 등으로 증폭,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돼 있다. 갑을관계는 소위 ‘갑질’이라고 일컬어지는 갑의 위치에서 을을 하인 부리듯이 대하는데서 비롯된다.

강준만은 ‘갑과 을의 나라’에서 한국인 다수에게 갑을관계는 이익차원의 개념일 뿐만 아니라 ‘을 위에 군림하는 맛’이라고 하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충족하는 삶의 기본문법이라고 보고 있다. 한국인이 갑을관계에 중독된 출발점은 뿌리 깊은 관존민비(官尊民卑)에서 비롯돼 오늘날에도 여전히 관(官)은 민(民)을, 대기업은 중소기업을 지배하는 갑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또한 배금주의에 기초한 사회진화론은 적자생존(適者生存)·약육강식(弱肉强食)·우승열패(優勝劣敗)를 긍정해 오늘날 갑을관계의 이념적 원형으로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는 것이다.

켄트 플래너리(Kent Flannery)와 조이스 마커스(Joyce Marcus)는 ‘불평등의 창조’에서 불평등이 인간사회에 내재한 자연스러운 현상도, 농경의 등장 같은 외부환경 변화에 따라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현상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 불평등은 모든 인간집단의 핵심에 있는 고유한 사회논리를 의도적으로 조작한 결과물로서 많은 사회에서 부채(빚), 족보, 신성한 지식 등을 이용해 서열순위를 조작, 높은 지위가 세습되도록 했고 그 결과 불평등이 시작됐다는 것이다.

갑을관계가 관존민비, 배금주의, 서열조작 등 어떤 이유로 발생했다 하더라도 현재 한국사회에는 팽배해 있고 이것이 국민적 감정을 자극하고 있다. 한국인은 사회·문화적으로 워낙 동질적인 사람들이어서 똑같아지려는 평등 욕구가 강하기 때문에 그만큼 동등대우를 받고 싶은 의지가 크다고 볼 수 있다. 또한 한국사회는 심정사회(心情社會)이므로 타인의 불편한 심정이 자기와 동조를 이루면 사회적 공분을 불러오게 된다.

갑질에 대처하는 개인적 방식에는 열심히 공부를 하거나 돈을 버는 등 소위 출세해 자기가 갑이 되는 것이다. ‘아니꼬우면 출세하라’는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해 고시와 전문직, 돈벌이에 매달리는 것이다. 다음으로 출세하는 게 여의치 않으면 우선 인맥이라도 갖추는 것이다. 인맥이 없으면 될 일도 안 되고, 인맥이 있으면 안 될 일도 되는 게 한국사회이므로 평소 자신의 연고를 철저히 잘 관리하는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 차원의 대처는 갑을관계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못하므로 사회적 차원의 대응이 필요하다. 다수의 대중들이 가능한 한 모든 힘을 모아 갑의 특권에 저항하는 것이다. 갑질의 부당한 관행에 지속적으로 이의를 제기하고 법과 제도 및 관행을 하나씩 고쳐 나가는 것이다. ‘나만 아니면 된다’는 사고의 탄성에서 벗어나서 다 같이 어울려 사는 성숙한 사회를 위해 침묵이 아닌 행동으로 힘을 모아야 갑과 을의 관계는 해소될 수 있을 것이다.
전찬열 (한국폴리텍대학 항공캠퍼스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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