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날
정월 대보름날
  • 경남일보
  • 승인 2015.03.04 0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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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곡 (시인)
양곡

동이 트기 전 할머니는 절 골까지 가셔서 계곡물로 몸을 씻고 천지신명께 용왕산제를 올렸다. 그동안 어머니는 쌀 보리 조 수수 팥으로 오곡밥을 지었다. 오곡밥과 아홉 가지 나물과 부럼을 방안에 차려 놓고 성주신에게 할머니는 또 빌었다. 할머니도 어머니도 무속인은 아니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나를 할머니는 불렀다. “예” 하고 답을 하자 “내 더위 다 사가라” 하시며 가족들 중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나에게만 더위를 팔았다.

좁은 방에 둘러앉은 우리는 밤이나 잣 호두 땅콩 같은 걸로 부스럼이 생기지 말라며 부럼을 깼다. 귀가 밝아야 한다며 귀밝이술을 먼저 마셨다. 비리가 오르지 않아야 한다며 생선을 나누고, 몸에 살이 좀 붙어야 한다며 두부를 먹고, 산나물 뜯으러 산에 가거든 새알을 주워야 한다며 아주까리 잎이나 김으로 오곡밥을 쌈 싸서 먹었다. 어머니는 방으로 들어오시기 전 나물과 오곡밥을 소에게 먼저 차려주었다.

복조리를 들고 밥을 얻으러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성받이가 다른 세 집 이상의 밥을 얻어 먹으면 좋다고 했다. 점심 때가 될 때까지 연을 날렸다. 오후에는 달집나무를 끌었다. 어른들이 산에 톱으로 베어 놓은 나무들을 아이들은 마을 한가운데 있는 논바닥까지 끌었다. 누가 굳이 시키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당연히 대나무도 조금, 짚단도, 새끼줄도 집집마다 조금씩 챙겨다가 어른들은 해가 지기 전에 달집을 세웠다. 한쪽에서는 매구패들이 지신밟기로 마지막 신명을 돋워내고 있었다.

할머니와 어머니는 짚단을 하나씩 챙겨들고 달을 보러 언덕배기나 산등성이로 올라갔다. 이때쯤에 올해에는 꼭 소원을 이뤄내야할 만한 마을의 청장년 하나가 달집에 불을 질렀다. 불 지른 죗값은 나중에 막걸리와 안주로 한 턱 내면 될 터이므로, “달떴다!” 소리만은 온 마을이 쩌렁쩌렁하도록 세 번을 질러야 했다. 조무래기들은 깡통에다가 쇠똥 불을 집어넣고 작대기 끝에 줄로 매달아 빙빙 돌리며 쥐불놀이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달집의 상대 끝에는 연이 달리고 액막이 헌옷가지와 소원종이가 달렸다. 달집이 타오르는 동안 마을 사람들은 다리미에 콩을 넣고 볶아 나누어 먹으며 설날에 남은 음식들과 막걸리 잔을 돌렸다. 설은 질어야 좋고 보름은 맑아야 좋다 했고, 설은 나가 쉬어도 보름은 집에서 쉬어야 한다고 했다.

 

[경일춘추]양곡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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