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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근 교수의 慶南文壇, 그 뒤안길(336)<97>경남지역의 문인 등단 50주년 기록자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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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5.07.20  15:4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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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에서 태어난 우리나라 문인들의 등단 50주년을 기록한 이들에 대해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은 아동문학가이자 소설가 향파 이주홍(1906-1987)을 보기로 한다. 이주홍은 경남 합천읍에서 출생했다. 향리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1년간 고학을 하다가 노동을 하며 일본 각지를 전전했다. 그후 잡지사와 교사로 재직하면서 창작을 하고 1925년에 ‘신소년’에 동화 <뱀새끼의 무도>로 등단했다. 그리고 1929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가난과 결혼>이 입선되어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이럴 경우 등단 연도를 잡기가 애매해진다. 1925년에 당선된 동화를 등단작으로 보느냐, 아니면 1929년에 입선한 소설 작품을 등단작으로 하느냐 하는 것이 헷갈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편의적으로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동화는 1925년에 등단했고 소설은 1929년에 등단했다.’고 분리 등단으로 구분짓는다는 것이다. 동화로 치면 이주홍의 50년은 1975년이 되고 소설로 치면 50년은 1977년이 된다. 그가 1987년에 돌아갔으니까 전자의 경우 등단 62년만에 돌아간 것이 되고, 후자의 경우 등단 58년만에 돌아간 것이 된다.

이주홍은 1949년부터 부산수산대학 교수로 재직했으므로 평생을 부산에서 살았고 1971년에 정년퇴임을 했다. 그런 뒤에도 부산에서 살았다. 이주홍은 같은 또래의 향토 작가로 김정한과 이경순(진주), 설창수(진주) 등과 친교를 맺고 살았다. 양산의 박노석시인과 마산의 정진업 시인과도 교분이 깊었다.그러나 설창수의 생존시의 위상은 만년을 기준으로 칠 때 이주홍과 김정한에 현실적으로 미치지 못했다. 그렇더라도 총량 위상을 헤아린다면 부산, 경남의 지역 문단의 삼각 위상은 ‘김정한-이주홍-설창수’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지역에 거주한 작가 시인들의 위상을 말하는 경우에 속한다.

이주홍은 그러나 만년에는 진주의 이경순 시인과 각별한 친교를 맺고 살았다. 그는 부산에 있기가 답답할 때는 고향 합천으로 달려갔는데 합천으로 가는 가운데 길목에 진주가 있어서 일단 하차하여 이경순 시인과 만나 차 한 잔을 나누었다. 필자는 그 어우름에 경상남도 문화상을 받았는데 심사위원으로는 이주홍, 이경순이 맡아 보았을 때였다. 필자가 받은 해는 1973년 제12회 도문화상 문학부문이었다. 이때 필자의 나이 32세였고 경남도 문화상 수상자 최연소 기록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왜 필자가 32세가 되는 연소한 연륜에 경상남도문화상을 받을 수 있었을까? 지금은 대개 60대 70대에 받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다. 이는 당시의 경남지역 문단이 갖는 황폐함 때문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부산과 마산은 6.25 전시에 피난민들이 밀려와 문학예술 세계도 피난 문인들이 대세를 이루었다.부산과 마산에 와 있던 문인들은 1950년대 후반과 60년대 초반까지 원래 위치인 서울로 돌아가자 경남의 문단은 썰물이 밀려나간 바닷가처럼 황량한 모래밭이 되었다. 60년대 말 필자는 서울서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진주로 왔는데 당시 경남에는 공식 등단 문인들은 10손가락 안이었다. 그 희소성에 힘입어 필자의 소년등과 같은 수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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