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일칼럼]잘 논다는 것
[경일칼럼]잘 논다는 것
  • 경남일보
  • 승인 2015.04.01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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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재청(시인·진주제일여고 교사)
한국은 세계자본주의의 중심으로 편입되면서 눈부실 정도의 경제적 성취를 이뤘지만 갈수록 노동생산성은 떨어지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간의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노동생산성은 점점 떨어지고, 많은 사람들이 시간 부재에 시달리고 있다. 오죽하면 몇 해 전 어떤 대선 예비후보조차 ‘저녁이 있는 삶’을 슬로건으로 내걸었겠는가. 그래서 이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시점이다. 잘 놀아야 그만큼 잘 생각할 수 있고 일을 잘할 수 있다.

생각해 보면 과거에 잘 논다는 것은 인문적 교양을 지닌 사대부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집안이 부유하다고 반드시 유유자적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다. 유유자적한 삶은 물질적으로 부유하더라도 인문적 교양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범접할 수 없는 지극한 삶의 한 경지였다. 그래서 사대부 집안의 선비만이 이러한 멋과 여유를 즐길 수 있었다. 시를 읊으며 자연의 아름다움을 만끽하고 술로 여흥을 돋우는 삶 자체가 그들에게는 곧 자부심이자 행복이었다. 유유자적하는 여유는 품위 있는 삶의 지렛대였다. 그런 의미에서 선비는 좋은 의미의 유인(遊人)이다. ‘유인’은 이처럼 누구나 꿈꾸었던 이상적 삶의 한 유형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노는 것이 부끄러운 시대가 됐다. 우리 사회가 본격적으로 산업화되고 신자유주의 경쟁체제에 돌입하면서부터이다. 우리 주변에 노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경쟁에서 도태된 것으로 치부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됐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자기 계발서들이 이 사실을 확인해 주고 있다. 자본과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는 사이 노는 것이 부끄러운 세상이 됐고, 어느덧 유인은 잊힐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자기 정체성도 점점 희박해질 수밖에 없게 됐다.


흔히 유인을 놀고먹는 사람으로만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근대화 과정에서 노는 것을 소모적으로만 생각해 온 관습 탓이다. 터무니없는 경쟁체제가 빚어낸 인간 본성에 대한 편견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유희적 존재라는 말도 있지만 잘 놀아야 창조적 에너지가 생기고, 그만큼 일도 잘할 수 있다. 삶의 여유와 멋을 회복함으로써 소비적 삶의 질적 변화를 꾀하는 방향으로 노는 것은 새로운 삶의 원천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갈수록 확대 재생산되는 경쟁체제 속에서 조직에 활력을 불어넣고 자신을 지탱하기 위해서도 생산적 놀이를 통한 이러한 변화의 노력은 필수적이다.

막간의 여유를 통해 자아를 회복함으로써 일상 속에서 작은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놀이는 작은 노력으로도 얼마든지 실천할 수 있다. 각종 동호회의 활성화는 이런 점에서 의미 있는 변화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자기 삶의 정서적 저변을 확대해 나가는 문화체험이나 답사 소모임이 조금씩 확대되는 것은 더욱 의미가 있다. 이러한 여유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키고 이웃과 소중한 인문적 스토리를 함께 공유한다면 얼마든지 사회의 긍정적 변화에도 기여할 수 있다. 이것은 두드러지지 않지만 일상 속에서 자신의 여유와 정체성을 찾으면서 사회에 참여하는 길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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