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형평운동을 세계기록유산으로
[기고] 형평운동을 세계기록유산으로
  • 경남일보
  • 승인 2015.08.06 14: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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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평운동(衡平運動)은 형평사를 설립하여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는 저울(衡)같이 평(平)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1923년 4월 일제 강점기에 ‘공평(公平)은 사회의 근본(根本)이요, 애정(愛情)은 인류의 본량(本良)이라’란 주지문(主旨文)발표하고 백정계급의 해방을 선언했다. 형평운동은 백정계급(白丁階級)의 차별을 철폐하여 만민이 평등한 공평한 세상을 이 땅에 이루고자 했던 우리나라 최초의 작은 백성을 위한 인권운동이었다.

또한 형평운동은 후 3·1독립운동이었다. 3·1운동 이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효과적인 독립운동을 위해 해외로 빠져 나갔을 때 형평운동은 나라 안에서 우리 땅을 밟고 인간평등을 선언하여 암암리에 독립자금을 모금하는 등의 항일 독립운동을 하였다. 진주 3·1독립운동을 주도한 강상호(栢村 姜相鎬)는 왜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출옥한 다음 우리 겨레가 서로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뭉쳐야만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고 나라 안에서 우리 땅을 밟고 민족의 얼을 기르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형평운동은 백정계급의 차별철폐운동이자, 민족과 이념을 뛰어넘는 천부적 인권존중의 운동이었으며,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으려는 후 3·1 항일 독립운동이었다.

따라서 형평운동은 사람사랑과 나라사랑의 민족적 염원이 투입된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민주주의 운동이었다. 이 형평운동은 일제강점기인 1923년 진주에서 발발하여 1935년 4월까지 무릇 12년 간이나 우리나라 전역에서 강력한 조직력으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형평운동의 발원지가 우리고장 진주이기에 뿌듯한 자부심마저 든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의 경우, 대구에서는 세계문화유산으로 유네스코(UNESCO)에 등재하기 위해 적극적인 절차를 밟고 있다. 국채보상운동 기념공원도 중심가 넓은 땅에 보기 좋게 만들었다. 진주에서도 형평운동의 고귀한 정신을 문학작품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형평문학제 조례안’ 제정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대구처럼 인권운동 산실인 형평운동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할 때다.

 
강호광 (민족문제연구소 진주지회 사무국장)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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